Kainos · Painters

조르조
데 키리코

형이상학적 회화의 창시자, 초현실주의의 선구자

Giorgio de Chirico  ·  1888 — 1978

모든 것의 이면에는 무언가가 있다.
이면의 이면에도.

— 조르조 데 키리코

현실 너머의 수수께끼를 그린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는 20세기 초 ‘형이상학적 회화(Pittura Metafisica)’를 창시한 이탈리아 화가입니다. 그리스 볼로스에서 이탈리아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텅 빈 이탈리아 광장(피아차)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 기이하게 어긋난 원근법, 얼굴 없는 마네킹을 배치하여 일상의 사물과 공간에 잠든 수수께끼를 깨웠습니다. 그의 화면에서 현실은 더 이상 익숙하지 않으며, 익숙한 것이 가장 낯설어지는 순간 — 그것이 키리코가 추구한 형이상학적 경험입니다.

앙드레 브르통은 키리코의 그림을 보고 초현실주의의 핵심 개념인 ‘경이로움(le merveilleux)’을 구상했고, 살바도르 달리, 르네 마그리트, 막스 에른스트 모두 키리코를 자신들의 정신적 아버지로 추앙했습니다. 초현실주의가 공식적으로 선언되기 10년 전, 키리코는 이미 그 모든 시각적 언어를 발명해 놓은 것입니다.

볼로스에서 로마까지 — 유럽을 가로지른 형이상학자

1888년 그리스 테살리아의 항구도시 볼로스에서 시칠리아 출신 철도 기술자 아버지와 제노바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지중해의 강렬한 빛과 고대 그리스 유적이 둘러싼 유년기의 풍경은 훗날 그의 화면을 지배하는 신비로운 광장과 고전적 조형물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아테네 폴리테크닉에서 미술을 시작한 후 1906년 뮌헨으로 건너가 미술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며, 아르놀트 뵈클린의 상징주의 회화와 프리드리히 니체의 철학에 깊이 심취했습니다.

1911년 파리에 정착하여 기욤 아폴리네르, 파블로 피카소 등 전위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형이상학적 회화의 전성기를 열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이탈리아 페라라의 군 병원에서 카를로 카라를 만나 형이상학적 회화 운동을 공식화했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부터 키리코는 전위 예술과 결별하고 라파엘로, 티치아노 등 르네상스 거장들의 고전적 기법으로 회귀하는 극적인 전환을 감행했습니다. 이 결정은 브르통을 비롯한 초현실주의자들과의 격렬한 갈등을 불러왔고, 자신의 초기 작품을 복제하거나 위작 논란에 휘말리는 등 후반생은 논쟁으로 점철되었습니다. 1978년 로마에서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텅 빈 광장의 수수께끼, 마네킹의 고독

1914

거리의 신비와 우수

긴 그림자가 드리운 텅 빈 아케이드 거리에서 소녀가 굴렁쇠를 굴리며 달려갑니다. 모퉁이 너머에서 다가오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거대한 그림자가 불길한 예감을 자아내는, 형이상학적 회화의 가장 상징적인 걸작입니다. 두 개의 어긋난 소실점이 만들어내는 불가능한 공간은 현실의 이면에 숨겨진 또 다른 질서를 암시합니다.

1914

사랑의 노래

고전적 아폴론 두상, 외과용 고무장갑, 초록색 공이 건물 벽에 나란히 걸려 있습니다. 서로 아무런 논리적 연관이 없는 사물들의 병치는 꿈의 논리를 따르며, 앙드레 브르통이 이 작품을 보고 초현실주의의 핵심 원리인 ‘경이로운 만남(rencontre merveilleuse)’을 떠올렸다고 증언한 기념비적 작품입니다.

1910

어느 가을 오후의 수수께끼

피렌체 산타 크로체 광장에서의 실제 경험에서 탄생한 이 작품은 키리코 형이상학의 출발점입니다. 가을 오후의 비스듬한 햇살이 만들어낸 기이한 그림자, 광장 위 단테 조각상의 고독한 실루엣 —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의 순간’을 시각화한 최초의 형이상학적 풍경화입니다.

1917

헥토르와 안드로마케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와 그의 아내 안드로마케가 마네킹의 형태로 포옹하고 있습니다. 얼굴 없는 두 존재의 기계적이면서도 비극적인 포옹은 전쟁 시기 인간 존재의 비인간화와 그럼에도 남아 있는 사랑의 본능을 동시에 말합니다. 고대 신화를 현대적 불안으로 번역한 키리코 후기 형이상 회화의 정수입니다.

1914

시인의 불안

뮌헨 현대 미술관 소장. 텅 빈 광장에 고전적 토르소 조각상과 바나나 다발이 나란히 놓여 있고, 배경에는 기차가 지나가는 아케이드 건물이 보입니다. 고대와 현대, 고급 예술과 일상의 사물이 꿈의 논리로 병치된 이 작품은 형이상학적 회화의 핵심 원리인 ‘사물의 탈맥락화’를 가장 명료하게 보여줍니다. 기욤 아폴리네르에게 헌정된 이 그림은 시인과 화가의 교류가 낳은 전위 예술의 결정체입니다.

1913

붉은 탑

구겐하임 미술관 소장. 이탈리아 광장의 아케이드 너머로 붉은 벽돌 탑이 우뚝 솟아 있고, 전경에는 기마상의 작은 실루엣이 보입니다. 비정상적으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와 어긋난 소실점이 만들어내는 불가능한 공간은 현실의 표면 아래 숨겨진 또 다른 질서를 암시합니다. 강렬한 붉은색과 노란색의 대비가 오후의 작열하는 태양과 시간의 정지를 동시에 환기하며, 키리코 초기 형이상학적 도시 풍경의 정수를 보여주는 걸작입니다.

텅 빈 광장, 어긋난 원근법, 사물의 수수께끼

키리코의 형이상학적 회화를 규정하는 핵심 혁신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피아차(piazza)의 형이상학입니다. 이탈리아 도시의 아케이드와 광장을 무대로 삼되, 인간의 부재를 통해 공간 자체에 심리적 무게를 부여합니다. 텅 빈 공간은 역설적으로 보이지 않는 존재감으로 충만하며, 건축물은 더 이상 배경이 아니라 침묵의 주인공이 됩니다.

둘째, 시간의 왜곡과 긴 그림자입니다. 비정상적으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는 오후의 특정 순간을 영원히 정지시키며, 화면 밖 보이지 않는 존재의 그림자는 다가올 미지에 대한 불안과 예감을 자아냅니다. 하나의 화면에 여러 소실점이 공존하여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공간을 만들어내며, 이는 현실의 표면 아래 숨겨진 또 다른 질서를 가시화합니다.

셋째, 사물의 탈맥락화입니다. 고전 조각상, 외과용 장갑, 비스킷, 기차, 굴뚝 등 서로 무관한 사물들을 하나의 화면에 병치시켜 꿈의 논리를 현실에 이식합니다. 이 ‘경이로운 만남’의 기법은 훗날 초현실주의의 가장 중요한 시각적 전략이 되었습니다.

형이상학적 회화(Pittura Metafisica)의 탄생

1910년 가을, 피렌체 산타 크로체 광장에서 키리코는 결정적인 계시를 경험합니다. 비스듬한 가을 햇살 아래 광장의 모든 것이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게 다가온 순간, 그는 니체의 영원회귀 개념을 시각적으로 체험했다고 회고합니다. 이 경험에서 탄생한 ‘어느 가을 오후의 수수께끼’는 형이상학적 회화의 출발점이 되었고, 이후 페라라에서 카를로 카라와 함께 이를 하나의 예술 운동으로 체계화했습니다. 현실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되 그 배치와 맥락을 전복시켜 ‘사물 이면의 수수께끼’를 드러내는 이 방법론은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나아가 팝 아트에까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정적의 혁명가 — 속도의 시대에 멈춤을 그리다

키리코가 활동한 시기의 이탈리아 미술계는 마리네티가 이끄는 미래주의(Futurismo)의 열풍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미래주의자들이 속도, 기계, 역동성, 전쟁의 미학을 찬양할 때, 키리코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그의 화면에는 움직임이 없고, 시간이 정지해 있으며, 텅 빈 공간의 침묵만이 지배합니다. 미래주의가 미래를 향해 질주했다면, 키리코는 현재의 이면으로 침잠했습니다.

한편 프랑스 초현실주의자들과의 관계는 더욱 복잡했습니다. 브르통은 키리코를 초현실주의의 정신적 아버지로 선언했고, 달리는 ‘거리의 신비와 우수’를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으며, 마그리트는 키리코의 사물 탈맥락화를 평생의 방법론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 고전주의로 회귀한 키리코는 초현실주의를 ‘퇴폐적 유행’이라 비난했고, 브르통은 ‘키리코는 1918년에 죽었다’고 선언하며 결별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키리코가 불과 6~7년간(1910~1917) 집중한 형이상학적 회화는 20세기 미술사 전체의 흐름을 바꿔놓은 반면, 후반생 60여 년간 매진한 고전주의 작품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수수께끼의 광장은 영원히 텅 비어 있다

키리코의 형이상학적 회화는 초현실주의를 넘어 20세기와 21세기 시각문화 전반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앤디 워홀의 반복적 이미지, 데이비드 호크니의 공간 실험, 웨스 앤더슨 영화의 대칭적이고 초현실적인 공간 구성은 모두 키리코의 시각적 DNA를 공유합니다. 비디오 게임에서 등장하는 불가능한 건축물과 형이상학적 풍경 역시 키리코 없이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일상의 사물과 공간을 낯설게 만들어 그 이면에 숨겨진 수수께끼를 드러내는 키리코의 방법론은 현대 예술의 기본 전략이 되었습니다. 텅 빈 광장에서 울려 퍼지는 침묵, 길게 늘어진 오후의 그림자가 암시하는 보이지 않는 존재, 얼굴 없는 마네킹이 품고 있는 인간 존재의 수수께끼 — 키리코가 만들어낸 이 형이상학적 세계는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현실의 이면을 들여다보라고 조용히 권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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