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보는 하나다. 음표도, 박자도, 강약도 모두 동일하다. 그런데 같은 베토벤 9번이 세 사람의 손을 거치면 전혀 다른 음악이 된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지휘봉 아래에서 오케스트라는 거울처럼 완벽하게 빛난다. 레너드 번스타인이 단상에 오르면 음악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숨을 몰아쉰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팔을 들어올리는 순간, 음악은 마치 땅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해석이 창조가 되는 이 기적은, 지휘자라는 존재가 얼마나 신비로운 직업인지를 증명한다.
세 사람은 역사상 가장 자주 비교되는 지휘자들이다. 카라얀과 번스타인은 동시대를 살았고 서로를 의식했다. 푸르트벵글러는 카라얀의 스승 세대였으며, 카라얀의 전설은 일부 푸르트벵글러의 그늘에서 시작됐다. 번스타인은 푸르트벵글러의 음반을 반복해서 들으며 지휘를 배웠다고 고백했다. 그들을 연결하는 실은 단 하나, 같은 악보를 더 깊이 읽으려는 집착이다.
카라얀: 완벽함이라는 이름의 독재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눈을 감고 지휘했다. 악보는 이미 머릿속에 있었다. 오케스트라는 그의 손짓 하나에 숨을 죽이고, 그가 원하는 소리를 정확히 만들어냈다. 어떤 이는 그것이 권위주의라 했고, 어떤 이는 그것이 예술이라 했다. 실상은 둘 다였다.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그는 20대에 이미 “기적의 카라얀”이라 불렸다. 울름과 아헨의 군소 오케스트라를 거쳐, 1955년 마침내 베를린 필하모닉의 종신 수석 지휘자 자리에 올랐다. 그 후 35년 동안 베를린 필하모닉은 카라얀의 악기였다. 단원들은 그를 존경했고, 두려워했으며, 때로는 증오했다. 하지만 그가 만들어내는 소리 앞에서는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완벽함이란 세부 사항들의 총합이다. 그리고 세부 사항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카라얀의 음악에는 특유의 ‘레가토’가 있다. 음과 음 사이의 경계를 지우고, 모든 선율이 하나의 유려한 흐름으로 연결된다. 그의 브람스는 강물처럼 흐르고, 그의 베토벤은 조각처럼 정밀하다. 비판자들은 그것이 너무 매끄러워 인간적 결함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 ‘완벽한 소리’를 한 번 들으면 쉽게 잊히지 않는다.
그는 또한 최초로 음악을 ‘미디어 사업’으로 이해한 지휘자였다. 음반, 영화, 텔레비전 — 카라얀은 클래식 음악을 스크린 안으로 끌어들이는 데 집착했다. 그가 직접 연출한 오페라 필름들은 오늘날에도 고전으로 남는다. 1989년 7월, 마지막 리허설을 마치고 며칠 뒤 세상을 떠났다. 베토벤 7번. 그의 마지막 악보였다.
번스타인: 음악은 온몸으로 말한다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봉을 들면, 무대 전체가 달라진다. 그는 뛰고, 몸을 숙이고, 때로는 점프했다. 어떤 지휘자들은 그것을 과장이라 했다. 그러나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달랐다. 번스타인의 몸이 원하는 소리를 먼저 말했고, 그들은 그 언어를 읽었다. 그것은 계산이 아니라 충동이었고, 충동은 음악을 살아있게 했다.
매사추세츠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음악을 허락받지 못했다. 아버지는 피아노를 사주기를 거부했고, 번스타인은 이모집 오래된 피아노로 스스로 배웠다. 하버드에서 음악을 공부한 뒤, 1943년 운명의 날이 왔다. 뉴욕 필하모닉의 객원 지휘자 브루노 발터가 갑작스럽게 병으로 쓰러지자, 25세의 번스타인이 그 자리에 섰다. 리허설도 없이. CBS 라디오로 생중계된 그날의 공연은 미국 음악사에 기록됐다.
“음악이란 뭔가를 말하려는 충동이다. 그 충동이 없으면 음악도 없다. 기술만 있을 뿐이다.”
번스타인은 지휘자이면서 작곡가였고, 교육자였으며, 사회운동가였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그가 30대에 완성한 뮤지컬이지만, 그 화성과 리듬은 전통 클래식 훈련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 그는 베토벤 9번을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지휘했다. ‘환희’ 대신 ‘자유’라는 가사를 붙여서. 그것은 음악으로 쓴 역사였다.
카라얀과의 관계는 복잡했다. 두 사람은 공연에서 만날 때마다 서로를 끌어안았지만, 음악적 철학은 정반대였다. 카라얀이 완벽한 조각상을 만들었다면, 번스타인은 숨 쉬는 생명체를 풀어놨다. 어떤 청중은 카라얀 앞에서 경외감을 느끼고, 번스타인 앞에서 해방감을 느꼈다. 두 사람은 1990년,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푸르트벵글러: 악보 뒤에 숨겨진 심연을 듣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지휘봉은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의 박자는 불명확했고, 손짓은 흔들렸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박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신호를 읽었다. 그것은 음악의 ‘숨결’이었다. 불확실한 다운비트 속에서 오케스트라는 서로를 더 열심히 들었고, 결과는 유례없는 유기적 앙상블이 됐다. 그의 단원들은 이를 두고 “함께 숨 쉬는 것”이라 표현했다.
1886년 베를린에서 태어난 그는 철학자 아들이었다. 음악보다 철학을 먼저 공부했고, 베토벤을 연주할 때도 악보 너머의 형이상학적 차원을 찾았다. 그의 베토벤 5번은 악장과 악장 사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거대한 호흡처럼 흐른다. 악보에는 표시되지 않은 텐포의 신축성, ‘루바토’라 부르기에도 너무 자유로운 그 유연함은 어떤 지휘자도 정확히 재현하지 못했다.
“음악은 음표들 사이의 공간에 있다. 소리가 아니라 침묵을 채우는 것이 지휘자의 일이다.”
그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그림자가 따른다. 나치 집권기에 독일을 떠나지 않고 남아 지휘를 계속한 것이다. 히틀러의 생일 축하 연주를 거부하고, 유대인 음악가들을 보호하려 노력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그가 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전후 세계에서 끊임없이 소환됐다. 그럼에도 그의 음반들 — 특히 1942년 전시 중에 녹음된 베토벤 9번 — 은 오늘날까지 “이 곡의 가장 위대한 해석”으로 꼽힌다. 역사가 음악을 지우지 못했다.
카라얀은 푸르트벵글러의 후계자를 자처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전후 베를린 필하모닉 자리를 둘러싼 경쟁은 냉전만큼이나 냉랭했다. 1954년 푸르트벵글러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카라얀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비어있는 왕좌를 향한 35년의 독주가 시작된 것이다.
같은 악보, 세 개의 우주
베토벤 9번 4악장 마지막 코다를 들어보라. 카라얀의 베를린 필하모닉은 강철처럼 정밀하게 쏘아 올린다. 번스타인의 오케스트라는 폭발하듯 몸을 던진다. 푸르트벵글러의 연주는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사라진다. 악보는 하나인데, 우주는 셋이다.
세 사람이 남긴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음악이란 무엇인가 — 완벽하게 재현된 작곡가의 의도인가, 연주자가 그 순간 느끼는 감정의 언어인가, 아니면 악보가 가리키는 형이상학적 차원으로 가는 문인가. 카라얀은 첫 번째를, 번스타인은 두 번째를, 푸르트벵글러는 세 번째를 믿었다. 그들이 틀린 것이 아니라, 음악이 그만큼 넓다.
하나의 실험을 권한다. 같은 베토벤 교향곡 7번을 세 버전으로 들어보시라 — 카라얀(1963년 베를린 녹음), 번스타인(1978년 빈 필하모닉), 푸르트벵글러(1943년 전시 녹음). 텔레비전을 끄고, 눈을 감고, 세 개의 우주가 어떻게 다른지를 귀로만 느껴보는 시간. 그것이 지휘자라는 존재가 왜 필요한지에 대한 가장 명쾌한 답이 될 것이다.
추천 감상 — 같은 곡, 다른 해석
- 카라얀: 베토벤 교향곡 9번 (1962, 베를린 필하모닉), 브람스 교향곡 4번 (1963),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 ‘신세계’ (1964)
- 번스타인: 베토벤 교향곡 9번 (1989, 베를린 장벽 붕괴 기념), 말러 교향곡 9번 (1965, 뉴욕 필하모닉), 시벨리우스 교향곡 2번 (1966)
- 푸르트벵글러: 베토벤 교향곡 9번 (1942, 전시 녹음), 브람스 교향곡 1번 (1952),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주곡 (1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