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어에는 ‘샹송(chanson)’이라는 단어가 있다. 말 그대로 ‘노래’라는 뜻이지만, 20세기 파리의 공기를 마신 사람들에게 이 단어는 훨씬 크고 무거운 것을 의미한다. 사랑, 죽음, 빈곤, 자유, 반항 — 한 편의 노래 안에 삶의 전부를 담으려는 시도. 에디트 피아프, 자크 브렐, 조르주 브라상스는 각자의 방식으로 이 시도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세 사람이다. 이들의 목소리는 달랐고, 노래한 주제도 달랐으며, 세상을 보는 눈도 달랐다. 그러나 세 사람 모두 샹송이 단순한 유흥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이자 증언임을 몸소 증명했다.
세 사람은 같은 시대, 같은 도시에서 활동했다. 피아프가 파리 거리의 고아로 자라나 목소리 하나로 세계를 제패하는 동안, 벨기에 출신의 브렐은 고집스러운 신인으로 파리 무대에 도전했다. 브라상스는 파리 남쪽 시테 이즐레 근처의 하숙집에서 기타를 들고 서정시와 무정부주의 사이를 오갔다. 세 사람이 함께 같은 무대에 선 적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알았고, 존경했으며, 때로는 경쟁했다.
거리에서 태어난 목소리 — 에디트 피아프
에디트 피아프의 삶은 그녀의 노래보다 더 극적이다. 1915년 12월, 파리 벨빌 구역의 포장 도로 위 — 혹은 그녀가 즐겨 말하던 대로 “길바닥에서” — 태어난 피아프는 어린 시절을 서커스단, 노르망디의 매춘가, 그리고 파리 거리에서 보냈다. 정식 교육은 없었고, 악보를 읽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성대에는 어떤 악보도 담을 수 없는 것이 들어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 좋았던 것도, 나빴던 것도. 그것이 내 삶이었고, 내 노래였다.”
— 에디트 피아프
1935년, 나이트클럽 사장 루이 르플레가 거리에서 노래하는 스무 살의 피아프를 발견했다. 그는 그녀를 ‘라 피아프(La Môme Piaf)’ — 파리 방언으로 ‘참새’ — 라고 불렀다. 작은 몸집, 커다란 눈, 그리고 홀 전체를 집어삼키는 목소리. 이 별명은 그녀의 예명이 되었고, 이후 그녀의 모든 것을 상징하게 된다.
피아프의 노래는 고통을 피하지 않는다. 실연, 죽음, 가난, 중독 — 그녀는 삶의 어두운 면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노래했다. 1960년에 발표한 “Non, je ne regrette rien(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었다. 당시 알제리 독립전쟁으로 갈가리 찢겨 있던 프랑스 외인부대가 이 곡을 행진가로 삼으면서, 노래는 시대의 상처와 뒤엉켰다. 피아프 자신도 그 무렵 모르핀 중독, 세 번의 자동차 사고, 간경변으로 무너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무대에 서면 그 고통은 오히려 연료가 되었다. 무대 위의 피아프는 언제나 삶보다 더 살아 있었다.
그녀는 1963년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파리 페르 라셰즈 묘지에는 지금도 매일 꽃이 놓인다. 프랑스는 국가적 애도를 선언했고, 시인 장 콕토는 피아프의 부고를 듣고 충격으로 같은 날 사망했다. 하나의 목소리가 그 정도의 무게를 가졌다.
절규하는 시인 — 자크 브렐
자크 브렐이 처음 파리에 왔을 때,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벨기에 부르주아 가정의 아들, 판지 공장 직원, 아마추어 작곡가. 그가 파리의 클럽 오디션을 받으러 다닐 때 제작자들은 대부분 문전박대했다. 목소리가 좋지 않다는 평도 있었다. 브렐의 목소리는 확실히 피아프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무대에는 어떤 목소리도 대신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노래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다. 살기 위해 노래한다. 그리고 그 차이가 전부다.”
— 자크 브렐
브렐의 공연을 본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하나를 기억한다. 땀. 그는 노래가 끝나면 셔츠가 흠뻑 젖어 있었다. 무대 위에서 그는 단순히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노래를 살아냈다. 두 팔을 벌리고, 몸을 앞으로 숙이고, 눈을 부릅뜬 채 — 마치 청중 한 사람 한 사람의 목덜미를 잡고 흔들어 깨우려는 것처럼. 브렐은 여러 해 동안 연간 300회 이상의 공연을 소화했다. 그 무대들이 그의 몸을 갉아먹었다.
“Ne me quitte pas(제발 떠나지 마요)”는 그의 가장 유명한 노래지만, 가장 대표적인 노래는 아닐지도 모른다. 브렐이 더 자주 노래한 것은 연대와 분노였다. 그는 부르주아의 위선, 성직자의 위선, 전쟁의 어리석음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Les Bourgeois”에서 그는 안락한 중산층을 조롱했고, “La Chanson de Jacky”에서는 사라져버린 청춘과 꿈을 노래했다. 그의 가사는 시였고, 그의 멜로디는 논쟁이었다.
1967년, 브렐은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무대를 떠나 영화를 찍고, 작은 비행기를 몰고, 태평양의 마르키즈 제도로 떠나 원주민들과 함께 살았다. 1978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나이는 쉰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남긴 노래들은 아직도 살아 숨쉰다. 브렐의 곡은 오늘날까지 수십 개 언어로 번역되어 불리며, 뮤지컬 “Jacques Brel is Alive and Well and Living in Paris”는 그의 이름 자체가 신화가 되었음을 증명한다.
기타와 파이프의 아나키스트 — 조르주 브라상스
조르주 브라상스는 피아프도, 브렐도 아니었다. 그는 무대에서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화려한 드레스도 없었고, 땀에 젖은 셔츠도 아니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어쿠스틱 기타를 들고, 마치 옆에 앉은 친구에게 말하듯 노래했다. 그러나 그 조용한 노래 안에는 20세기 프랑스 사회 전체를 향한 통렬한 비판이 담겨 있었다.
“나는 신도 국가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우정은 믿는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가진 유일한 종교인지도 모른다.”
— 조르주 브라상스
브라상스는 무정부주의자였다. 그것은 단순한 포즈가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이 프랑스 청년을 강제 노동에 동원할 때, 그는 징집 명령에 불복하고 파리 어느 집 지하에 3년간 숨어 지냈다. 국가에 대한 불신은 그의 생애 전체를 관통한다. 그의 대표곡 “La Mauvaise Réputation (나쁜 평판)”에서 그는 군중의 기대에 맞춰 살기를 거부하는 외톨이를 노래하며,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전혀 동의하지 않아, 그리고 그것이 전부야.”
그러나 브라상스는 냉소주의자가 아니었다. 그의 가사 안에는 섬세한 서정성과 따뜻한 유머가 공존한다. 빅토르 위고, 폴 베를렌, 프랑수아 비용의 시에 직접 곡을 붙여 부르는가 하면, 연인에게 보내는 달콤한 세레나데를 쓰기도 했다. 그가 사용한 언어는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인정하는 고급 불어였다. 브라상스의 노래는 교사들에게 문학 교재로 쓰였고, 지금도 프랑스 학교에서 가르친다. 반체제 아나키스트가 교과서에 실리는 아이러니 — 브라상스라면 아마 그 사실에 씁쓸하게 웃었을 것이다.
파리의 세 가지 진실
피아프
사랑
사랑은 피아프에게 삶 그 자체였다. 거기서 상처받고, 거기서 일어섰다.
브렐
자유
브렐의 자유는 허무에 맞서는 반항이었다. 그는 떠남으로써 자유로워졌다.
브라상스
반항
브라상스의 반항은 조용했다. 그러나 그 침묵이 가장 오래 울렸다.
세 사람은 같은 언어로 노래했지만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았다. 피아프는 사랑을 노래했다 — 그러나 그 사랑은 결코 달콤하지 않았다. 잃어버린 사랑, 죽어버린 연인, 스스로를 불태우는 열정. 그녀의 노래에서 사랑은 구원이자 파멸이다. 브렐은 자유를 노래했다 — 그러나 그가 원한 자유는 낭만적인 것이 아니었다. 무리에서 이탈할 수 있는 용기, 부조리한 세계 앞에서 절규할 수 있는 권리. 브라상스는 반항을 노래했다 — 그러나 그의 반항은 시끄럽지 않았다. 가장 조용한 목소리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피아프, 브렐, 브라상스는 서로 공개적으로 평가한 기록이 많지 않다. 그러나 남아 있는 증언들은 흥미롭다. 브렐은 피아프를 “내가 아는 가장 위대한 예술가”라고 불렀다. 브라상스는 브렐의 “Ne me quitte pas”를 “20세기 최고의 샹송”으로 꼽았다. 피아프는 브라상스의 시적 자유를 부러워했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경쟁자가 아니라, 같은 예술의 다른 극단에 서 있는 탐험가들이었다.
오늘 밤 파리 어느 카페에서 샹송이 흘러나온다면, 그 노래에는 이 세 사람의 그림자가 겹쳐 있다. 피아프가 가르쳐준 것은 목소리란 기술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것이다. 브렐이 가르쳐준 것은 무대란 장소가 아니라 약속이라는 것이다. 브라상스가 가르쳐준 것은 반항이 가장 날카로울 때는 가장 조용한 순간이라는 것이다. 세 사람이 남긴 노래들은 프랑스어를 모르는 사람에게도 무언가를 전한다. 언어 너머의 인간적 진실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