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유럽은 폐허였다. 파리는 한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뉴욕의 몇몇 화가들이 조용히,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미술의 역사를 바꾸기 시작했다.
그들은 공통된 선언문도, 공식적인 그룹 이름도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공유하고 있었다—형태를 버리겠다는 의지. 원근법, 서사, 식별 가능한 사물. 수백 년간 서양 회화를 지탱하던 기둥들을 하나씩 걷어낼 것. 그 폐허 위에 무언가 전혀 새로운 것을 세울 것.
추상표현주의라는 이름은 나중에 붙었다. 당시 이 화가들은 그냥 그림을 그렸다. 더 정확히는, 그림과 싸웠다. 잭슨 폴록은 캔버스 위에서 춤을 췄고, 마크 로스코는 색깔로 사람을 울렸으며, 빌럼 드 쿠닝은 2년 동안 같은 그림을 완성하지 못했다. 세 사람의 전쟁터는 모두 달랐다.
추상표현주의의 배경
1940년대 뉴욕에는 나치를 피해 망명한 유럽 예술가들이 몰려들었다.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브르통, 화가 막스 에른스트, 피에트 몬드리안. 그들의 아이디어—무의식, 자동기술법, 순수 추상—가 미국 화가들의 뇌 속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폭발했다. 유럽이 뿌린 씨앗이 미국 땅에서 다르게 자랐다.
폴록: 그림 안으로 들어간 사람
잭슨 폴록이 이젤을 버린 것은 1947년경이었다. 그는 캔버스를 바닥에 펼쳤다. 붓 대신 막대기를 들었다. 물감을 캔버스 위에 떨어뜨리고, 흘리고, 뿌렸다. 화가는 그림 주위를 맴돌며 춤추듯 움직였다. 훗날 미술 비평가 해롤드 로젠버그는 이것을 “액션 페인팅”이라 불렀다.
폴록은 이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바닥에서 작업하는 게 편하다. 나는 그림에 더 가까이 느낀다. 그림의 일부가 되는 느낌이랄까. 그것 주위를 걷고, 네 방향 모두에서 작업하고, 그림 안에 있을 수 있다.”
전통적인 회화에서 화가는 캔버스 앞에 서 있다. 주체와 대상이 분리되어 있다. 폴록은 그 경계를 허물었다. 그의 그림에는 붓질의 흔적이 없다—대신 몸의 궤적이 있다. 물감의 방울, 선, 층위들은 화가가 캔버스 위를 어떻게 이동했는지를 기록한다. 일종의 신체 지도다.
그러나 폴록을 단순히 “물감을 흘리는 사람”으로 보는 것은 오해다. 그는 완성된 그림들에서 무엇이 살아있고 무엇이 죽어있는지를 날카롭게 판단했다. 수십 번 다시 작업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우연은 재료였지, 목적이 아니었다.
리 크래스너의 역할
폴록의 아내이자 동등한 예술가였던 리 크래스너는 폴록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를 처음 스튜디오에 데려온 것도, 화상 페기 구겐하임과 연결해준 것도 그녀였다. 폴록이 알코올 중독으로 무너져갈 때 그녀는 곁을 지켰고, 1956년 폴록이 음주운전으로 사망한 후 그의 유산을 정리하며 평생 뒤에서 빛나던 화가로 남았다. 오늘날 크래스너는 독립적인 대가로 재평가받는다.
폴록은 44세에 죽었다. 술을 마시고 차를 몰다가. 그가 남긴 드립 페인팅들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들 중 하나다. 〈No. 5, 1948〉은 경매에서 1억 4천만 달러에 팔렸다. 하지만 폴록이 살아있을 때 그것들은 그냥 그의 헛간 스튜디오에 쌓여 있는 캔버스였다.
로스코: 색깔로 울리는 사람
마크 로스코의 그림들은 얼핏 단순해 보인다. 거대한 캔버스 위에 두세 개의 흐릿한 색 사각형. 그게 전부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그 앞에 오래 서 있으면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심장이 조여든다. 눈물이 날 것 같다. 무언가를 잃었다는 느낌.
로스코는 그 효과를 의도했다. 그는 말했다.
“나는 비극, 황홀, 운명을 표현하는 데 관심 있다. 내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은 내가 그것을 그릴 때 가졌던 것과 같은 종교적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 제국의 드빈스크(현 라트비아)에서 태어난 유대인 이민자였던 로스코는 미국에서도 오랫동안 가난했다. 그는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고, 오랫동안 신화적인 장면들을 그렸다. 색면 추상으로의 전환은 1940년대 후반에 일어났다. 그는 형태를 모두 걷어냈다. 남은 건 색깔뿐이었다. 그런데 색깔이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었다.
1958년, 로스코는 인생 최대의 의뢰를 받았다. 뉴욕 시그램 빌딩의 고급 레스토랑 ‘포시즌스’를 위한 벽화 연작.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그는 2년간 작업했다. 그런데 완성 직전, 그는 계약을 파기했다.
시그램 벽화를 돌려준 이유
로스코는 훗날 이렇게 털어놓았다. 어느 날 그 레스토랑에서 직접 식사를 했는데, 거기 오는 사람들이 어떤 종류인지를 실감했다고. 부유하고 행복한 사람들이 멋진 음식을 먹으며 떠드는 곳. 그는 자신의 그림이 그 공간에 걸리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그 방에 오는 사람들의 식욕을 잃게 만들고 싶었는데,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완성된 그림들은 결국 런던 테이트 모던과 일본 가와무라 기념관에 기증됐다.
로스코는 텍사스 휴스턴에 자신의 이름을 딴 예배당 건립을 승인했다. 로스코 채플. 14점의 검고 어두운 그림들이 팔각형 건물의 벽을 채우는 공간. 종교나 종파를 가리지 않는 명상의 장소. 1971년 개관했지만 로스코는 개관식을 보지 못했다. 1970년, 그는 뉴욕 스튜디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67세였다.
드 쿠닝: 끝내지 않는 사람
빌럼 드 쿠닝은 1950년대 초 〈Woman I〉이라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 그림을 2년 동안 완성하지 못했다. 수백 번 수정하고, 지우고, 다시 그렸다. 미술사가 마이어 샤피로가 작업실을 방문해 “이미 훌륭한 그림이오”라고 설득한 후에야 붓을 놓았다.
이 싸움은 드 쿠닝의 핵심이었다. 그는 추상과 구상 사이에서 영원히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추상표현주의 동료들은 대부분 구상을 완전히 버렸다. 폴록의 드립 페인팅에는 인물이 없다. 로스코의 색면에는 얼굴이 없다. 하지만 드 쿠닝은 여성의 형태를 캔버스로 계속 끌어들였다. 거칠게, 분열되게, 공격적으로.
“육체는 내가 그릴 수 없는 이유가 아니라, 내가 그려야 하는 이유다. 그것은 도전이다. 그리고 나는 도전에서 도망치지 않는다.”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태어난 드 쿠닝은 22세에 미국으로 밀입국했다. 뉴욕에서 집을 칠하고 광고 디자인을 하며 생활했다. 그는 아카데미식 훈련을 받은 유일한 추상표현주의자였다—로테르담 미술공예학교에서 8년을 공부했다. 그 기초가 그를 더 담대하게 만들었다. 기초가 있으니 파괴하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그의 붓질은 폭력적이다. 찌르고, 긁고, 뭉개고, 겹친다. 〈Women〉 연작의 여성들은 아름답지 않다.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눈이 너무 크다. 몸은 왜곡되어 있다. 비평가들은 분노했다. “여성 혐오”라는 말도 나왔다. 드 쿠닝은 개의치 않았다.
알츠하이머의 마지막 그림들
1980년대 후반, 드 쿠닝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그의 작품이 그 이후 어떻게 변했는가는 미술계의 논쟁 주제가 됐다. 말기에 그린 그림들은 거의 깨끗하다. 이전의 격렬함 대신, 흐르는 듯한 선들이 캔버스를 유영한다. 일부 비평가들은 이것을 쇠퇴로 봤다. 다른 이들은 평생의 투쟁 끝에 찾아온 정화라고 했다. 드 쿠닝은 92세까지 살았다. 붓을 놓은 것은 거의 마지막이었다.
같은 파괴, 다른 전쟁터
세 사람이 공유한 것은 무엇이었나. 그들은 모두 그림이 “무엇을 보여주는가”보다 “무엇을 하는가”에 관심이 있었다. 재현이 아니라 경험. 묘사가 아니라 충돌. 그들에게 그림은 이미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문서가 아니라, 그림 앞에 선 사람에게 지금 일어나는 사건이었다.
이것은 미술 역사에서 전례 없는 일이었다. 르네상스 이후 500년간, 그림의 가치는 대상을 얼마나 잘 재현했느냐로 측정됐다. 추상표현주의자들은 그 척도를 통째로 버렸다. 대신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이 색깔의 진동이 당신의 가슴 어딘가를 건드리는가. 이 물감의 궤적에서 살아있는 무언가를 느끼는가.
물론 모두가 동의하지 않았다. 당시에도, 지금도. 누군가는 여전히 “저게 왜 예술이냐”고 묻는다. 그 질문에는 답하기 어렵다. 하지만 로스코의 그림 앞에서 운 사람들, 폴록의 캔버스 앞에서 현기증을 느낀 사람들은 안다. 그 그림들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파괴는 목적이 아니었다. 파괴 이후의 빈 공간—그것이 그들이 원한 것이었다. 거기서 당신이 무엇을 느끼는지.
폴록은 44세에, 로스코는 67세에, 드 쿠닝은 92세까지 살았다. 수명도, 기질도, 화풍도 달랐다. 하지만 세 사람 모두 캔버스를 전쟁터로 삼았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그리고 그 전쟁은 항상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그들이 파괴한 것은 형태였다. 그들이 창조한 것은 자유였다— 보는 사람이 그림 앞에서 자신만의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 자유.
꼭 마주해야 할 작품
- 폴록: No. 5, 1948 · No. 31, 1950 · 라벤더 안개 No. 1 (1950)
- 로스코: 시그램 벽화 연작 · 로스코 채플 (1971) · No. 61 (녹청과 파랑, 1953)
- 드 쿠닝: Woman I (1950–52) · Excavation (1950) · Interchange (19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