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 심사위원단은 쿠르베의 대형 캔버스 두 점을 거부했다. 농부의 장례식을 역사화 크기로 그린 그림과, 아틀리에 안의 화가 자신을 우화적으로 담은 그림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너무 현실적이었다.
쿠르베는 기다리지 않았다. 박람회장 바로 맞은편에 판자로 임시 전시관을 세웠다. 간판에는 이렇게 적었다. ‘리얼리즘—쿠르베 개인전’. 미술사상 최초의 개인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하나의 선언이기도 했다.
귀스타브 쿠르베, 장 프랑수아 밀레, 오노레 도미에. 세 사람은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활동한 사실주의(Réalisme) 화가들이다. 그들이 거부한 것은 단지 아카데미즘의 규범이 아니었다. 그들은 ‘미술이란 아름다운 것을 그려야 한다’는 전제 자체에 저항했다.
쿠르베: 돌 깨는 사람이 영웅이다
오르낭의 매장1849–1850
1849년 쿠르베는 길을 걷다 두 남자가 돌을 깨는 장면을 목격했다. 한 명은 너무 늙어 이런 일을 하기엔 지쳐 보였고, 한 명은 너무 어려 이미 삶이 닳아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다가가 포즈를 부탁했고, 나중에 그림으로 옮겼다. 〈돌 깨는 사람들〉이었다.
당시 회화의 위계에서 역사화가 맨 위에 있었다. 신화, 성서, 고대의 영웅들이 대형 캔버스를 차지했다. 쿠르베는 그 크기를 도로공사 노동자에게 부여했다. 이것은 도발이 아니라 주장이었다—현실의 노동자도 역사의 주인공이다.
“나는 천사를 그린 적이 없다. 나는 천사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게 천사를 보여준다면 그려주겠다.”
이 말은 오만이 아니다. 쿠르베에게 그림은 경험의 기록이었다. 상상이나 이상화가 개입할 자리가 없었다. 그는 오르낭 출신의 농촌 사람이었고, 파리 화단이 아름답게 치장한 가난과 노동의 실제를 알고 있었다.
〈오르낭의 매장〉은 가로 6미터, 세로 3미터짜리 캔버스에 마을 장례식을 담은 그림이다. 인물들은 50여 명. 그들은 숭고하지 않다. 슬프지도 않다. 그냥 거기 서 있다—추위에 지치고, 지루하고, 각자의 생각에 잠겨. 비평가들은 격분했다. ‘성스러운 주제를 모독했다’고. 쿠르베는 그게 칭찬이라 여겼다.
파리 코뮌의 대가
1871년 파리 코뮌 당시 쿠르베는 예술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방돔 광장의 나폴레옹 기념주(柱)를 철거하는 데 관여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았고, 복구 비용을 전액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재산이 압류되자 스위스로 망명했다. 1877년 그는 오르낭에서 멀지 않은 라투르드펠즈에서 홀로 숨을 거뒀다. 유해는 그가 평생 그렸던 고향 오르낭 땅에 묻혔다.
밀레: 이삭 줍는 여인에게 성인의 빛을
이삭 줍는 여인들1857
장 프랑수아 밀레는 쿠르베보다 조용한 사람이었다. 시위도, 선언도, 개인전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이 불러일으킨 불편함은 쿠르베 못지 않았다.
1857년 살롱에 출품된 〈이삭 줍는 여인들〉을 보자. 세 명의 농촌 여인이 허리를 굽혀 추수가 끝난 밭에서 떨어진 이삭을 줍고 있다. 구약성경 룻기에 등장하는 이삭 줍기, 즉 가난한 자들이 지주의 허락 하에 남겨진 곡식을 거두는 행위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1789년 혁명 이후에도 여전히 이 관습이 존재했다.
밀레는 이 세 여인을 마치 성화(聖畵) 속 성인처럼 그렸다. 낮고 넓은 수평선, 황금빛 빛살, 묵직한 침묵. 비평가들은 ‘사회주의 선동’이라 했다. 이 그림이 농민들에게 자신들의 고단한 노동이 존엄하다는 메시지를 줄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나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고, 농부로 살 것이다. 나는 그것을 숨기고 싶지 않다.”
밀레가 바르비종에 정착한 것은 1849년이었다. 콜레라를 피해 파리를 떠나 퐁텐블로 숲 인근의 작은 마을에 뿌리를 내렸다. 이후 27년을 그곳에서 보냈다. 매일 이른 아침, 밭으로 나가는 농부들과 함께 하루를 시작했다.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이 사실적인 이유는 그들이 이웃이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건 밀레가 원래 초상화가로 파리에서 경력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귀족과 부르주아의 얼굴을 그려 생계를 유지했다. 바르비종 이주는 그 세계에서 스스로를 끊어낸 결단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를 밀레로 만들었다.
반 고흐의 스승
밀레가 죽은 지 5년 후, 네덜란드의 한 젊은 화가가 그의 작품을 모사하는 데 수년을 바쳤다. 빈센트 반 고흐였다. 고흐는 밀레를 ‘농부의 화가 중의 화가’라 불렀고, 〈이삭 줍는 여인들〉을 비롯한 밀레의 작품 수십 점을 자신의 색채로 재해석했다. 고흐에게 밀레는 교과서가 아니라 복음이었다.
도미에: 감옥에서도 붓을 꺾지 않았다
삼등 열차1862–1864
오노레 도미에는 화가이기 전에 풍자 화가였다. 그는 석판화로 먹고살았고, 그의 전장은 살롱이 아니라 신문이었다. 프랑스 주요 풍자지 《르 샤리바리》에 수십 년간 4,000점 이상의 캐리커처를 실었다. 당시 그의 그림은 파리 시민들이 카페에서 읽던 신문 속에 있었다.
1832년, 그는 루이 필리프 국왕을 서양배 모양의 얼굴로 묘사한 캐리커처를 발표했다. 6개월 징역형이 선고됐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다시 붓을 들었다. 이번엔 더 신랄하게.
“진지하게 살 필요가 있다. 하지만 진지하게 보일 필요는 없다.”
도미에의 회화 작품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건 사실 사후의 일이다. 생전에 그의 유화는 거의 팔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남긴 유화들— 특히 〈삼등 열차〉—은 오늘날 19세기 가장 강력한 사회적 회화로 평가받는다.
〈삼등 열차〉를 보면 알 수 있다. 19세기 중반 파리의 3등 열차 칸—가난한 사람들이 타던 자리—에서 노파, 젊은 어머니, 아이들이 짐처럼 앉아 있다. 창밖의 빛은 그들을 비추지 않는다. 인물들은 각자의 지침 속에 갇혀 있으며, 서로 말을 걸지 않는다.
도미에는 이 장면에서 고발하거나 감상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냥 보여준다. 그리고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무겁다. 풍자 화가였던 그가 유화 앞에서 가장 조용해졌을 때, 그의 그림은 가장 큰 소리를 냈다.
말년의 어둠
도미에는 말년에 시력을 거의 잃었다. 생활고로 셋방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을 때, 코로가 그에게 발리 하나를 구해줬다. 도미에는 거기서 생의 마지막 몇 년을 보냈다. 1879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파리는 그를 영웅으로 추모했다. 4,000점의 캐리커처와 수백 점의 유화, 그리고 감옥에서도 꺾이지 않은 한 사람의 이야기가 거기 있었다.
추한 것들이 진실을 말할 때
세 사람이 ‘사실주의’라는 이름으로 묶이지만, 그들의 방법론은 달랐다. 쿠르베는 싸웠다—예술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주장했다. 밀레는 살았다—농촌에 뿌리를 내리고 그 삶을 그대로 캔버스에 옮겼다. 도미에는 찔렀다—풍자라는 날카로운 도구로 권력과 사회의 위선을 도려냈다.
이들이 공통으로 거부한 것은 ‘아름다운 거짓말’이었다. 신화 속 영웅, 이상화된 풍경, 귀족의 우아한 초상. 그 모든 것은 실제 사회의 불평등과 고통을 은폐하는 데 기여했다. 사실주의자들은 그 막을 걷어내고자 했다.
역설적인 건, 그들이 ‘추하다’는 이유로 거부당한 그림들이 지금 세계 최고의 미술관에 걸려 있다는 사실이다. 오르세 미술관의 관람객들은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앞에서 발을 멈춘다. 쿠르베의 오르낭 장례식 앞에서 침묵한다. 도미에의 삼등 열차 앞에서 뭔가를 생각한다.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 안에 있다. 하지만 진실은 그림 안에 있다.
쿠르베의 그림이 거부당한 그 해, 그는 자비로 전시관을 세웠다. 입장객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 결정이 미술사를 바꿨다. 사실주의는 이후 인상주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20세기의 수많은 사조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름다움을 거부한 세 사람은, 결국 미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다시 물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아직도 유효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