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을 출판했다. 책은 처음에 거의 팔리지 않았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달랐다. 그들은 그 책에서 새로운 대륙을 발견했다—무의식이라는, 아직 아무도 그려본 적 없는 영토를.
초현실주의자들은 프로이트의 발견을 예술의 언어로 번역하기로 했다. 이성이 잠드는 곳에서 진짜 인간이 모습을 드러낸다고, 그들은 믿었다.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눈을 감았을 때 펼쳐지는 세계가 더 진실에 가깝다고.
살바도르 달리, 르네 마그리트, 막스 에른스트. 세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꿈에 접근했다. 달리는 꿈을 연기했고, 마그리트는 꿈을 논증했으며, 에른스트는 꿈을 발굴했다. 같은 운동, 세 개의 전혀 다른 방법론.
달리: 나는 초현실주의 그 자체다
살바도르 달리·1904–1989·스페인
편집증적-비판적 방법(paranoid-critical method)으로 꿈의 논리를 극사실주의로 구현. ‘기억의 지속’의 녹아내리는 시계로 시간과 현실을 해체했다.
1929년 어느 날, 달리는 카망베르 치즈 한 조각이 햇볕에 녹아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눈앞에 그림이 펼쳐졌다. 리가트 항구의 황금빛 해변, 그 위에 축 늘어진 시계들. 그는 갈라에게 물었다. "5년 후에도 이 그림이 기억에 남겠어?" 갈라가 답했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야." 그렇게 〈기억의 지속〉은 두 시간 만에 완성됐다.
달리의 방법은 역설적이었다. 그는 꿈을 그리기 위해 극도로 정밀한 기술을 사용했다. 르네상스 巨匠들처럼 세부를 닦고 또 닦았다. 하지만 그 정밀함으로 그려낸 것은 불가능한 광경들이었다. 꿈의 내용을 현실의 기술로—그것이 달리의 공식이었다. 그는 이 방법을 ‘편집증적-비판적 방법’이라 불렀다. 의식이 통제하기 전에 무의식이 떠올리는 이미지들을, 최대한 손대지 않고 옮기는 것.
“나와 광인의 차이는 딱 하나다. 나는 미치지 않았다.”
하지만 달리는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결국 추방당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프란코 지지, 상업주의 논란, 히틀러에 대한 모호한 태도. 앙드레 브르통은 그의 이름을 아나그램으로 뒤집어 ‘아비다 달라’(Avida Dollars, 돈에 굶주린 자)라고 불렀다. 달리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이미 유명 인사였고, 그 자체가 초현실주의였다.
프로이트와의 만남
1938년, 달리는 런던에서 망명 중이던 프로이트를 직접 찾아갔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가져갔다. 프로이트는 그것을 한참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그림에서 나는 무의식을 찾으려 했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에서 무의식은 완전히 의식적입니다." 달리에게 이것은 최고의 찬사였다. 반년 후 프로이트는 세상을 떠났다.
마그리트: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르네 마그리트·1898–1967·벨기에
철학적 퍼즐로 언어와 이미지 사이의 간극을 탐구. 평범한 사물의 낯선 배치로 보는 이의 인식 자체를 흔들었다.
브뤼셀 외곽, 아담한 테라스 하우스. 마그리트는 매일 아침 양복을 입고 중절모를 쓴 채 작업실에 출근했다. 이웃들은 그를 보험 회사 직원쯤으로 알았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불온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1929년, 마그리트는 사실적으로 그려진 파이프 아래에 이렇게 썼다. “Ceci n’est pas 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처음 이 그림을 본 사람들은 황당해했다. 파이프처럼 생겼는데 파이프가 아니라니. 하지만 마그리트는 옳았다. 캔버스 위의 것은 파이프가 아니었다—파이프의이미지였다. 거기에 담배를 넣을 수 없었고, 집을 수도 없었다.
마그리트의 작업은 언어와 이미지, 이름과 사물 사이의 틈새를 파고드는 철학적 탐구였다. 사과로 얼굴을 가린 신사(〈인간의 아들〉), 창문 밖 풍경이 그림인지 실제인지 알 수 없는 이젤(〈인간의 조건〉), 거울에 뒷모습이 비치는 남자. 그의 그림에는 해답이 없었다. 오직 질문만이 있었다. 당신이 보는 것을 당신은 정말 알고 있는가?
“내 그림은 신비를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신비를 더 신비롭게 만들 뿐이다.”
어머니와 드레스
마그리트가 열네 살이던 1912년, 어머니가 사맹브르 강에 투신했다. 시신이 발견됐을 때 드레스가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마그리트는 이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는 설도 있고 아니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그의 그림에는 천으로 덮인 얼굴들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연인들〉에서 두 남녀는 천에 감싸인 채 키스한다. 얼굴 없는 존재들—마그리트에게 가장 불안한 형상이 무엇이었는지, 그림이 말해준다.
에른스트: 우연이 만든 풍경
막스 에른스트·1891–1976·독일
프로타주·그라타주 등 우연성 기법으로 무의식을 ‘발굴’. 다다이즘에서 초현실주의로 이어지며 두 운동 모두를 이끈 실험가.
1925년 여름, 에른스트는 비가 내리는 날 바닥의 낡은 나무 판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에 젖어 결이 도드라진 나무 표면에서 그는 갑자기 환각 같은 형상들을 보았다—새, 머리, 숲, 괴물. 그는 종이를 올리고 연필로 표면을 문질렀다. 프로타주(frottage), 탁본처럼 문질러 형태를 뜨는 기법이 그렇게 탄생했다.
에른스트의 발상은 간단하지만 혁명적이었다. 이미지를 발명하지 말고발굴하라. 예술가의 의도가 아니라 재료의 우연이 형태를 만들도록 내버려 두라. 그는 캔버스에 물감을 붓고 유리판으로 긁는 그라타주, 줄에 물감을 묻혀 캔버스 위에서 흔드는 기법도 고안했다. 무의식을 직접 그리는 대신, 무의식이 스스로 나타나는 조건을 만들었다.
1차 세계대전이 에른스트를 초현실주의로 밀어넣었다. 포병대 하사로 4년을 보낸 뒤, 그는 다시는 현실의 논리를 믿지 않게 됐다. 이성이 선택한 세계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참호 속에서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다다이즘으로 시작한 그의 반란은, 초현실주의에서 체계를 찾았다.
“예술은 과학이 아니다. 하지만 발견은 예술에도 있다. 나는 내가 그린 것을 그리기 전까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적국 예술가
1939년 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프랑스는 독일 출신의 에른스트를 적국 외국인으로 분류해 두 차례 억류했다. 두 번째 억류에서 그를 구해준 건 미국의 미술 후원자 페기 구겐하임이었다. 그녀는 에른스트를 탈출시키고 결혼까지 했다—비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1942년 뉴욕에 도착했고, 에른스트의 초현실주의는 미국 추상표현주의에 깊은 씨앗을 뿌렸다.
같은 꿈, 다른 방법
세 사람은 프로이트의 발견을 공유했지만, 무의식으로 가는 길은 달랐다.
연기(演技)
살바도르 달리
1904–1989
꿈의 이미지를 극사실주의 기술로 무대화. 이성이 작동하기 전 떠오르는 것을 붙잡아 정밀하게 재현한다.
논증(論證)
르네 마그리트
1898–1967
낯선 병치와 언어적 역설로 현실 인식에 균열을 낸다. 그림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발굴(發掘)
막스 에른스트
1891–1976
우연과 재료에 주도권을 넘겨 의식이 아닌 조건이 이미지를 만들도록 한다.
초현실주의 선언(1924)에서 앙드레 브르통은 이 운동을 이렇게 정의했다. “이성의 통제 없이, 미학이나 도덕적 선입견 없이, 실제 생각을 받아쓰는 것”. 하지만 세 사람이 그 정의를 구현한 방식은 전혀 달랐다.
달리는 자신의 꿈을 가장 의식적으로 통제했다. 그의 ‘편집증적-비판적 방법’은 무의식을 재료로 쓰되 예술가의 기교로 형태를 빚었다. 마그리트는 일상의 사물을 썼다— 사과, 파이프, 모자, 구름. 그것들을 불가능하게 배치함으로써 현실이 얼마나 자의적인지를 드러냈다. 에른스트는 가장 멀리 갔다. 그는 예술가의 의도 자체를 의심하고, 우연에게 붓을 넘겼다.
흥미로운 건 세 사람 모두 한 가지 공통된 적을 가졌다는 점이다. 바로 합리주의. 두 차례 세계대전이 보여준 이성 문명의 결말 앞에서, 그들은 다른 출구를 찾았다. 꿈, 무의식, 우연—이 세 가지가 그들에게는 탈출구였고, 동시에 더 깊은 진실이었다.
당신이 잠들 때 당신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달리는 97세까지 살며 자신의 신화를 직접 관리했고, 마그리트는 브뤼셀 교외의 조용한 집에서 죽는 날까지 양복을 입고 그림을 그렸으며, 에른스트는 뉴욕과 파리를 오가며 85세까지 새로운 기법을 실험했다. 세 사람은 그림 바깥에서도 완전히 달랐다—한 명은 스타였고, 한 명은 은둔자였으며, 한 명은 망명자였다.
초현실주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세계가 이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그리고 그 나머지를 캔버스에 담겠다는 선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