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8년 6월 18일 아침, 찰스 다윈은 말레이 제도에서 온 편지 한 통을 열었다. 읽어 내려가는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편지에는 자신이 20년 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론 —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 — 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 그에게는 거의 낯선 이름이었다.
역사에서 같은 아이디어를 동시에 발견하는 사례는 드물지 않다. 미적분을 라이프니츠와 뉴턴이, 산소를 프리스틀리와 셸레가 동시에 발견했다. 그러나 자연선택 이론의 동시 발견은 그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사례로 꼽힌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 도달한 경로가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영국 젠틀맨의 서재에서, 다른 한 사람은 열대 밀림의 오두막에서.
두 사람의 궤적
찰스 다윈 (1809–1882) · 영국 케임브리지 출신 · 『종의 기원』 저자 — 자연선택 이론의 공동 발견자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 (1823–1913) · 영국 몬머스셔 출신 · 『말레이 제도』 저자 — 생물지리학의 창시자
다윈: 20년을 침묵한 이유
1809–1882
찰스 다윈은 1809년 영국 슈루즈베리의 유복한 의사 가정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에라스무스 다윈은 계몽주의 시대의 박식가였고, 아버지 로버트 다윈은 성공한 의사였다. 그러나 찰스는 의학 공부를 포기하고 신학으로 방향을 틀었다가, 결국 자연사에서 자신의 소명을 찾았다. 케임브리지 졸업 직후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해군 측량선 비글호의 박물학자 자리였다.
1831년부터 5년간 이어진 비글호 항해는 다윈의 세계관을 근본부터 흔들었다.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그는 섬마다 부리 모양이 다른 핀치새들을 관찰했다. 남아메리카 해안에서는 멸종한 거대 포유류의 화석이 현존하는 동물들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귀국 후 그는 조심스럽게 한 가지 생각을 노트에 적었다. “종은 변한다.”
“나는 마치 고백을 하는 것 같은 기분으로 — 실제로 그것은 살인을 자백하는 기분이지만 — 종이 불변하지 않는다고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 찰스 다윈, 친구 조지프 후커에게 보낸 편지 (1844)
그러나 다윈은 발표하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두려움이었다. 당시 영국 사회에서 종의 불변성은 신학적 전제이자 사회 질서의 근거였다. 인간이 유인원과 공통 조상을 가진다는 생각은 신성 모독에 가까웠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아내 엠마 웨지우드를 사랑했던 다윈은 이 이론이 그녀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할지 알고 있었다. 그는 증거를 계속 쌓으며 기다렸다. 1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났다.
1856년, 친구 찰스 라이엘의 강한 권유로 다윈은 마침내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책을 구상했다. 비둘기 사육자들과의 인터뷰, 품종 개량의 기록, 화석 증거들을 꼼꼼히 정리했다. 그리고 1858년 6월, 말레이에서 그 편지가 도착했다.
월리스: 열병과 모기장 속에서 발견한 진리
1823–1913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는 다윈과 정반대의 출발점에 서 있었다. 웨일스의 빈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 교육을 받지 못했다. 14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형의 측량 사무소에서 일을 배웠으며, 생계를 위해 박물 표본 수집과 판매에 뛰어들었다. 그에게 탐험은 낭만이 아니라 직업이었다.
1848년 월리스는 친구 헨리 베이츠와 함께 아마존으로 떠났다. 4년간의 탐험 끝에 귀국하는 길, 배가 불에 타며 모든 표본이 바다에 잠겼다. 4년의 노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나 월리스는 멈추지 않았다. 1854년, 그는 말레이 제도로 향했다. 이번에는 8년을 머물렀다. 수마트라, 보르네오, 자바, 뉴기니를 누비며 12만 5천여 점의 표본을 수집했다.
“어느 날 밤 말라리아 열병으로 떨고 있을 때, 맬서스의 인구론이 떠올랐다. 강자는 살아남고 약자는 죽는다 — 이 과정이 수천 년 누적되면 종이 변한다는 생각이 갑자기 번쩍 떠올랐다.”
—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 자서전 (1905)
1858년 2월, 말레이 제도 테르나테 섬의 오두막. 월리스는 말라리아로 며칠째 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모기장 속에서 식은땀을 흘리다 문득 맬서스의 인구론이 떠올랐다. 식량은 산술급수로 늘고 인구는 기하급수로 는다는 그 이론. 그 순간 월리스는 깨달았다. 자연도 마찬가지다. 태어나는 개체보다 살아남는 개체가 적다면, 살아남는 개체에는 어떤 특성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특성은 다음 세대로 전해진다. 그것이 진화다.
열이 가라앉는 동안 그는 논문을 썼다. 그 논문을 당대 최고의 자연학자, 비글호 항해로 유명한 찰스 다윈에게 검토를 부탁하며 보냈다. 그리고 답신을 기다렸다.
1858년 7월 1일: 과학사에서 가장 우아한 타협
편지를 받은 다윈은 즉시 라이엘과 후커에게 달려갔다. 상황은 절박했다. 20년간의 연구가 무명의 수집가에게 선취권을 빼앗길 위기였다. 그러나 다윈은 공정한 사람이었다. 월리스의 논문을 그냥 묻어버릴 수는 없었다. 라이엘과 후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두 사람의 논문을 함께 발표하되, 다윈이 먼저 이 아이디어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1844년의 초고를 함께 제출하자.
1858년 7월 1일, 런던 린네학회에서 다윈과 월리스의 논문이 동시에 낭독되었다. 두 사람 모두 그 자리에 없었다. 다윈은 갓 태어난 아들을 성홍열로 잃고 장례를 치르는 중이었다. 월리스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말레이에서 표본을 수집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논문이 발표된 사실조차 한동안 알지 못했다.
“당신이 발견한 것이 아름다운 이론이라면, 나는 당신이 먼저 그것을 발표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 발견의 영예가 우리 둘 모두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 월리스가 훗날 다윈에게 한 말로 전해지는 문장
이 타협이 공정했는가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 논쟁이 있다. 월리스는 그 발표 방식을 미리 허락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평생 다윈에게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책 제목을 『다윈주의』로 짓고, 다윈이야말로 자연선택 이론의 진정한 창시자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그것을 겸손이라 했고, 어떤 이는 빅토리아 시대 계급 의식의 내면화라 했다.
1859년 11월,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판되었다. 초판 1,250부는 출판 당일 매진되었다. 세상은 들끓었다. 종교계는 격렬히 반발했고, 과학계는 서서히 수용했다. 월리스는 말레이에서 귀국한 후 이 모든 논쟁의 목격자가 되었다.
다윈의 길
- 비글호 5년 항해 — 갈라파고스의 핀치새
- 20년 침묵 속에 증거를 쌓다
- 맬서스에서 자연선택의 메커니즘을 착안
- 『종의 기원』 — 과학사 최고의 베스트셀러
- 영국 사회에서 '중심부'의 시선
월리스의 길
- 아마존과 말레이, 두 번의 탐험
- 열병 중 단 이틀 만에 핵심을 착안
- 12만 점 표본 — 생물지리학의 기초
- 「월리스 선」— 동양구와 호주구를 가르는 경계
- '주변부'의 시선으로 자연을 보다
다윈 이후: 월리스가 간 더 먼 길
월리스는 자연선택 이론에서 한 가지 예외를 두었다. 인간의 지성이었다. 그는 자연선택만으로는 인간의 수학적 사고 능력이나 음악적 감수성을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프리카 원시 부족이 왜 리만 기하학을 이해할 수 있는 두뇌를 가져야 하는가? 그것은 생존에 불필요한 능력이다. 월리스는 그 답을 자연 너머에서 찾았다 — 영적 힘이 인간 지성의 도약을 이끌었다는 결론이었다.
다윈은 이 결론에 격렬히 반대했다. 편지에서 그는 월리스에게 “당신이 우리 아이를 죽이고 있습니다”라고 썼다. 그러나 월리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심령술사들과 교류했고, 강신술 실험에 참여했으며, 사회주의와 토지 국유화를 지지했다. 인도주의자로서 영국 제국주의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다윈은 그런 월리스를 이해하면서도 따라가지 못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존중하며 평생의 서신을 이어갔다. 1882년 다윈이 세상을 떠났을 때, 월리스는 가장 먼저 조문 편지를 보낸 이 중 하나였다. 훗날 월리스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다윈 없이는 자신의 이론이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다윈 없는 세계에서도 월리스의 이론은 결국 세상을 바꾸었을 것이다. 과학사가 제임스 무어가 말한 대로, “진화는 그 시대의 공기 속에 있었다.”
위대한 발견의 운명을 가른 것은 20년의 침묵도, 열대의 열병도 아니었다. 그것은 출발선의 차이였다. 젠틀맨의 서재와 열대의 오두막, 중심부와 주변부. 그 차이가 같은 아이디어에 다른 이름을 붙였다. 우리가 지금 “다윈주의”라고 부르는 것을, 어쩌면 “월리스주의”라 불렀을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