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5월 29일 파리, 샹젤리제 극장. 막이 오르고 바순 한 대가 인간의 음역을 한참 벗어난 높이에서 선율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객석에서 조소와 야유가 터졌다. 이내 주먹다짐이 벌어졌다. 경찰이 출동했다. 이것이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초연이었다.
청중은 무엇에 그토록 분노했을까? 박자였다. 화음이었다. 멜로디마저 낯설었다. 수백 년 동안 서양 음악을 지배해온 조성(調性)의 문법이 무대 위에서 공개적으로 파괴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파괴는 스트라빈스키 혼자의 일이 아니었다. 같은 시대, 아르놀트 쇤베르크와 벨러 바르톡도 각자의 방식으로 화성이라는 오래된 궁전에 균열을 냈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나라, 서로 다른 기질, 서로 다른 해법을 지녔다. 그러나 그들이 공유한 것이 있었다. 음악은 ‘아름다워야 한다’는 19세기의 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확신. 이 글은 그 세 가지 결별의 이야기다.
스트라빈스키: 박자를 폭발시킨 자

「봄의 제전」이 폭동을 일으킨 이유는 불협화음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리듬이었다. 스트라빈스키의 악보를 처음 펼친 지휘자들은 박자표가 마디마다 바뀐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8/8, 5/8, 3/16, 7/8…. 이 작품은 인간의 몸이 느끼는 박동을 의도적으로 배반했다. 발이 박자를 맞출 수 없는 음악. 그것이 스트라빈스키의 선언이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스트라빈스키는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작곡을 배웠다. 스승은 그에게 화려한 오케스트레이션과 러시아 민요의 향기를 물려주었다. 하지만 제자는 스승이 결코 허락하지 않을 길로 나아갔다.
“좋은 작곡가는 모방하지 않는다. 그는 훔친다.”
「봄의 제전」 이후 스트라빈스키는 놀랍게도 방향을 틀었다. 그는 모차르트와 바흐로 돌아갔다. 신고전주의라 불리는 이 선택은 동시대 아방가르드들에게 배신처럼 보였다. 하지만 스트라빈스키에게 그것은 또 다른 파괴였다. 18세기의 언어를 20세기의 냉소로 재조립하는 것. 「풀치넬라」와 「피아노 소나타」에서 그는 옛것을 인용하면서 동시에 비틀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그를 영원한 망명자로 만들었다. 스위스, 프랑스, 미국을 전전하며 그는 시민권을 세 번 바꿨다. 그러나 음악은 멈추지 않았다. 말년에는 심지어 쇤베르크의 12음 기법마저 흡수했다. 스트라빈스키는 특정 사조에 귀속되기를 거부한 영원한 변신자였다.
쇤베르크: 음계를 해체한 철학자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음악의 역사를 선형으로 읽었다. 바흐에서 베토벤, 바그너로 이어지는 흐름은 하나의 방향을 가리켰다. 화성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불협화음은 점점 더 자주 해결을 유보했다.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이미 조성은 흔들리고 있었다. 쇤베르크는 그 논리적 끝까지 걸어갔다.
그가 도달한 곳은 무조성(無調性)이었다. 특정 음을 중심으로 돌아오는 조성의 중력을 제거하는 것. 1908년 이후 그의 음악에는 더 이상 으뜸음이 없었다. 「세 개의 피아노곡 Op.11」을 들으면 어느 음도 다른 음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 모든 음이 평등한 세계. 그것은 아름답기도 했지만, 지독하게 낯설었다.
“내 제자들의 제자들이 살아 있을 때쯤, 사람들은 내 음악으로 휘파람을 불 것이다.”
쇤베르크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무조성은 자유롭지만 혼돈스러웠다. 그는 새로운 질서를 찾아 1920년대에 12음 기법을 발명했다. 옥타브 안의 12개 반음을 특정 순서(음렬)로 배열하고, 그 순서를 뒤집고, 거울처럼 반전시키며 음악을 구성하는 방법. 일종의 수학적 엄격함으로 자유를 통제하는 역설이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인이었던 쇤베르크는 나치즘이 대두하자 1933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퇴폐 예술’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가르치며 살았지만, 그의 음악은 끝내 대중의 귀에 낯선 채로 그의 생애를 마쳤다. 그러나 12음 기법은 전후 유럽 음악의 근간이 되었다. 불론과 노노와 슈토크하우젠이 모두 그의 뒤를 따랐다.
바르톡: 들판에서 찾아온 혁명

1906년, 헝가리의 한 시골 마을. 25세의 벨러 바르톡이 축음기와 오선지를 들고 농부들 사이에 앉아 있었다. 그는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채보했다. 8음 장음계도 단음계도 아닌 선율들. 서양 음악 이론이 가르쳐준 어떤 틀에도 들어맞지 않는 리듬들. 바르톡은 이 발견에 전율했다.
그가 코다이와 함께 수집한 민요는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를 넘어 터키와 북아프리카에까지 이어졌다. 총 수천 곡. 이 민요들은 쇤베르크처럼 이론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땅에서 자란 또 다른 화성 언어였다. 교회선법, 비대칭 박자, 반음 아래의 단2도 충돌. 이 모든 것이 바르톡의 어법이 되었다.
“민요는 자연의 현상이다. 위대한 예술 작품과 마찬가지로, 그 완벽함은 과학적 분석이 아니라 직접적인 체험에 의해서만 파악된다.”
바르톡의 음악에는 독특한 긴장감이 있다. 「현악기, 타악기와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에서 퍼지는 불길한 선율, 「현악 4중주 4번」에서 맞부딪히는 날카로운 피치카토. 이것은 쇤베르크의 추상적 수학과도, 스트라빈스키의 원시적 에너지와도 달랐다. 그것은 분쟁과 평화가 동시에 존재하는 동유럽의 역사처럼 들렸다.
1940년, 파시즘이 헝가리를 잠식하자 바르톡은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는 철저히 잊혔다. 공연 요청은 줄었고, 병마는 깊어졌다. 1945년 뉴욕에서 눈을 감을 때, 그는 자신의 「비올라 협주곡」을 완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의 장례식에는 열 명도 채 모이지 않았다. 그러나 전후의 음악계는 그를 조용히 복권시켰고, 지금 그의 이름은 20세기 최고의 작곡가 명단에서 빠지지 않는다.
세 가지 파괴, 하나의 유산
세 사람은 서로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품었다. 스트라빈스키와 쇤베르크는 평생 공개적으로 반목했다. 스트라빈스키는 12음 기법을 ‘너무 체계적’이라 비판했고, 쇤베르크는 스트라빈스키를 ‘역행하는 신고전주의자’라 비꼬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은 같은 시기 로스앤젤레스에 살면서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바르톡은 둘 모두를 존중했지만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는 민속 음악을 단순한 소재로 쓰는 것을 경계했다. 민요는 외부에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화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새소리가 모차르트에게 스며든 것처럼.
세 사람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부순 것은 결국 같은 것이었다. ‘음악은 편안하게 귀에 들어와야 한다’는 기대. 스트라빈스키는 몸이 박자를 잃게 만들었고, 쇤베르크는 귀가 안정을 찾을 수 없게 만들었으며, 바르톡은 낯선 땅의 선율로 서양의 귀를 낯설게 만들었다. 그 결과 탄생한 ‘아름다운 소음’은 우리가 음악을 듣는 방식을 영원히 바꿔놓았다.
처음 들었을 때 이해되지 않는 음악에 다시 귀를 기울여 보는 것. 그것이 어쩌면 이 세 사람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중요한 숙제일지도 모른다.
처음 듣는 이를 위한 입문 감상곡
- 스트라빈스키: 「불새」 모음곡 (1919년판) → 「봄의 제전」 → 「피아노 소나타」
- 쇤베르크: 「정화된 밤」 → 「피에로 뤼네르」 → 「피아노 모음곡 Op.25」(12음 기법)
- 바르톡: 「루마니아 민속 무곡」 → 「피아노 협주곡 3번」 → 「현악기, 타악기와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