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는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17세기 피렌체에서 탄생한 이래, 이 종합예술은 시대마다 누군가에 의해 해체되고 다시 세워졌다. 19세기, 세 사람이 거의 동시대에 그 과업을 떠맡았다. 베르디는 이탈리아의 영혼을 오선지 위에 새겼고, 바그너는 오페라의 문법 자체를 갈아엎었으며, 푸치니는 무대 위에 날것의 인간을 세웠다. 방향은 달랐지만, 세 사람 모두 오페라가 무엇일 수 있는지를 근본부터 다시 물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실제로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점이다. 베르디와 바그너는 1813년 같은 해에 태어났고 — 한 사람은 이탈리아 파르마 근교에서, 한 사람은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 평생 서로를 의식했다. 푸치니는 바그너의 혁명을 공부하며 자란 세대였으나, 그가 선택한 길은 전혀 달랐다. 세 사람이 만들어낸 오페라의 세계는 오늘날에도 주요 오페라 레퍼토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베르디: 오페라로 이탈리아를 깨우다

1842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가 초연되던 밤, 3막의 히브리 노예 합창 ‘Va, pensiero’가 울려 퍼지자 청중이 일어서서 “비바 베르디!”를 외쳤다. 표면상 바빌론 유수의 이야기였지만, 오스트리아 지배 아래 신음하던 이탈리아인들은 그 선율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베르디의 이름은 ‘Vittorio Emanuele Re D’Italia(이탈리아의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의 이니셜이라는 소문이 퍼졌고, 극장 벽에는 “VIVA VERDI!”라는 낙서가 가득했다.
파르마 근교 작은 마을의 여관 주인 아들로 태어난 베르디는 밀라노 음악원 입학 시험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나이가 많고 피아노 기술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그 굴욕을 품고 돌아간 그는 훗날 그 음악원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기숙사를 기증했다. 그것이 베르디의 방식이었다. 쓰러지지 않고, 증명한다.
“나는 항상 내 음악이 인간의 목소리를 닮기를 원했다. 악기들은 그것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베르디의 혁명은 오페라에서 인간을 돌려놓은 것이다. 당시 오페라는 성악가의 기교를 뽐내는 무대로 전락해 있었다. 극의 흐름보다 아리아의 화려함이 우선이었고, 등장인물들은 관습적 감정의 껍데기를 걸친 허수아비에 가까웠다. 베르디는 달랐다. ‘리골레토’의 광대 아버지, ‘라 트라비아타’의 병든 창녀, ‘오텔로’의 질투에 무너진 장군 — 그들은 모두 결함을 가진 살아있는 인간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만년이다. 일흔이 넘어 세익스피어의 ‘오텔로’와 ‘팔스타프’를 오페라로 만든 그는 완전히 새로운 언어를 구사했다. ‘팔스타프’는 베르디의 유일한 코미디 오페라로, 그때까지의 그 무엇과도 달랐다. 80세에 그는 음악의 청년이었다. 초연이 끝난 뒤 관객들이 앙코르를 요청하자, 그는 무대로 나와 직접 지휘봉을 들었다고 전한다.
바그너: 오페라를 해체하고 다시 짓다

바그너는 오페라를 “음악극(Musikdrama)”이라 불렀다. 오페라라는 단어조차 쓰기를 거부했다. 그에게 기존 오페라는 성악가를 위한 쇼였고, 음악과 드라마가 제각각이었으며, 인류의 심층을 건드리기에는 너무 피상적이었다. 그는 고대 그리스 비극처럼 시, 음악, 연극, 무대미술, 무용이 하나로 녹아드는 ‘총체예술(Gesamtkunstwerk)’을 꿈꿨다.
그 실현을 위해 바그너가 발명한 가장 강력한 도구가 라이트모티프 (Leitmotiv)다. 특정 인물, 감정, 사물, 개념에 짧은 음악적 동기를 할당하고, 이 동기들을 오케스트라가 극 전반에 걸쳐 변주하며 실처럼 엮는 방식이다. ‘반지 사부작(니벨룽의 반지)’에는 수십 개의 라이트모티프가 흐르며, 대사로는 말하지 않는 것을 오케스트라가 관객에게 속삭인다.
“음악은 불꽃이 빛을 내듯, 사랑이 불꽃을 내듯이 예술에서 빛을 발해야 한다.”
1876년, 바이에른 바이로이트에 자신만을 위한 축제극장이 완성됐다. 바그너는 음향을 위해 오케스트라 피트를 객석 아래에 완전히 숨겼다. 객석의 조명을 꺼 청중이 무대에만 집중하게 했다. 관객이 야유를 보낼 수 없도록 박수 시점을 규정했다. 그것은 단순한 극장이 아니라 예술적 의식(儀式)의 공간이었다. 오늘날에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수년치 대기 리스트가 있는 성지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음악사에서 한 획을 긋는 작품이다. 조성을 끊임없이 지연시키고 화음 해결을 회피하는 그 언어는 이후 반세기의 음악이 걸어갈 길을 예고했다. 쇤베르크는 바그너의 끝에서 출발했다고 고백했다. 사랑과 죽음과 욕망이 뒤섞인 이 음악극은 철학자 니체가 열광했다가 절교를 선언하게 만든 바로 그 작품이기도 하다.
푸치니: 눈물은 가장 솔직한 언어다

푸치니는 두 거인 사이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야 했다. 베르디의 전통과 바그너의 혁명 — 그는 어느 쪽도 완전히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두 흐름을 녹여 전혀 다른 무언가를 만들었다. 그것은 ‘베리스모 (verismo)’, 날것의 현실주의다. 영웅이 아닌 가난한 시인, 결핵에 걸린 재봉사, 버림받은 게이샤를 무대 위에 세웠다.
루카의 음악 가문에서 태어난 푸치니는 바그너의 음악을 들으며 성장했다. 실제로 ‘라보엠’과 ‘토스카’에는 바그너식 라이트모티프의 흔적이 있다. 그러나 결정적 차이가 있었다. 바그너가 오케스트라를 철학의 그릇으로 썼다면, 푸치니는 그것을 관객의 심장을 직접 두드리는 망치로 썼다. ‘라보엠’ 4막에서 미미가 숨을 거둘 때, 그 슬픔은 복잡한 사전 지식 없이도 곧장 가슴에 꽂힌다.
“신이 내게 작은 선물을 주셨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선율이다. 나는 언제나 사람들이 울기를 바란다.”
‘나비부인’은 초연에서 혹평을 받았다. 관객의 야유 속에 막을 내렸고, 푸치니는 충격을 받아 악보를 전면 개정했다. 두 번째 공연에서 그것은 역대 가장 환호받은 초연 중 하나가 됐다. ‘어느 갠 날 (Un bel dì vedremo)’은 이후 오페라 역사상 가장 많이 불린 아리아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실패와 수정과 부활 — 그것 또한 그의 방식이었다.
마지막 작품 ‘투란도트’는 미완으로 남았다.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 그는 아직 류의 죽음 이후 장면을 쓰지 못한 상태였다. 그가 남긴 스케치를 토대로 제자 알파노가 완성했지만, 오늘날 많은 지휘자들은 푸치니의 마지막 음표에서 연주를 멈추고 잠시 침묵한다. 그 침묵이 작곡가의 진짜 마침표다.
세 가지 혁명, 하나의 무대
베르디는 오페라에 심장을 돌려줬다. 바그너는 그 심장을 우주만큼 크게 부풀렸다. 푸치니는 그것을 다시 일상의 온도로 낮춰 손 안에 쥐어줬다. 세 사람의 방향은 달랐지만, 결국 같은 질문을 향하고 있었다 — 오페라는 인간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오늘날 세계 오페라 공연의 통계를 보면, 상위 20개 작품 중 절반 이상이 이 세 사람의 것이다. 시대가 바뀌고 취향이 변해도, ‘리골레토’의 “La donna è mobile”이, ‘트리스탄’의 전주곡이, ‘나비부인’의 “어느 갠 날”이 낡지 않는 이유가 있다. 그것들은 기교가 아니라, 인간이 느끼는 것 — 사랑, 질투, 상실, 기다림 — 을 가장 직접적으로 번역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오늘 밤, 베르디의 ‘리골레토’ 중 “Caro nome”로 시작해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주곡을 지나, 푸치니의 ‘나비부인’ 중 “Un bel dì vedremo”로 마무리하는 여정을 만들어보시라. 세 가지 혁명이 어떤 온도로 귀에 닿는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추천 감상곡
- 베르디: 리골레토 중 “La donna è mobile”, 오텔로 중 “Credo”, 팔스타프 중 “È sogno? O realtà?”
-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주곡 및 사랑의 죽음, 발퀴레 중 “발퀴레의 기행”, 파르지팔 중 성금요일 음악
- 푸치니: 나비부인 중 “Un bel dì vedremo”, 라보엠 중 “Che gelida manina”, 투란도트 중 “Nessun dor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