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4년, 파리 살롱에 하나의 그림이 걸렸다. 화면 중앙에는 세 형제가 오른팔을 뻗어 칼을 쥔 아버지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었다. 색채는 절제되어 있었고, 구도는 무대처럼 정면을 향했으며, 인물들의 표정에는 감상이 아닌 결의가 담겨 있었다. 자크루이 다비드의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였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5년 전, 이 그림은 이미 혁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고대 로마의 공화주의를 캔버스 위에 소환하는 방식으로.
신고전주의(Neoclassicism)는 18세기 중반 유럽 전역을 휩쓴 미학 운동이다. 그 배경에는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1748년 폼페이의 발굴 — 화산재 아래 잠들어 있던 고대 로마가 원형 그대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다른 하나는 요한 요아힘 빙켈만의 선언이었다. 독일 미술사학자 빙켈만은 1755년 논문에서 그리스 미술의 핵심을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edle Einfalt und stille Größe)”이라 규정했다. 유럽의 예술가들은 이 문장에 답하듯 고대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나 세 사람 — 다비드, 앵그르, 카노바 — 이 고대를 불러들인 방식은 제각각이었고, 그 차이 속에 각자의 본질이 있다.
신고전주의를 형성한 결정적 순간들
자크루이 다비드: 혁명의 붓, 제국의 붓
Jacques-Louis David
Jacques-Louis David (1748–1825)
다비드는 역사상 가장 정치적인 화가 중 하나다. 그러나 그 정치성이 특정 이념에 묶여 있지 않았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공화주의 혁명을 그림으로 예고했던 그는 훗날 나폴레옹의 공식 화가가 되어 제국의 영광을 캔버스에 새겼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가 공화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덕목을 찬양했다면,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1801)은 백마 위에서 손을 뻗은 황제를 신화적 영웅으로 격상시켰다. 다비드에게 고대는 도구였다 — 당대가 요구하는 이상형을 입히기 위한 가장 권위 있는 옷.
그의 그림이 지닌 힘은 구성의 엄격함에서 나온다. 다비드는 고대 조각을 깊이 연구했고, 그 입체감을 평면에 옮기는 방법을 터득했다. 인물들은 무대 위의 배우처럼 정확한 위치에 배치되며, 각자의 동작은 서사적 긴장을 최대화하는 방향으로 계산된다. 색채는 감정을 자극하지 않는다. 대신 선명한 윤곽선과 균형 잡힌 명암이 화면을 지배한다. 다비드의 붓 앞에서 역사는 언제나 교훈이 된다.
“나는 그리스인들이 대리석으로 새겼던 것을 물감으로 그리고 싶었다. 그들의 덕목을, 그들의 공화주의를, 그들의 냉정한 아름다움을.”
— 자크루이 다비드
혁명기에 다비드는 화가를 넘어 문화 기획자가 되었다. 혁명 정부의 예술 정책을 주도하며 왕립 아카데미를 폐지하고 공화국의 공공 축제를 설계했다. 1793년, 혁명의 순교자가 된 마라(Marat)가 욕조에서 암살당한 지 며칠 만에 다비드는 〈마라의 죽음〉을 완성했다. 이 그림은 조작된 보도사진이자 성화(聖畫)였다 — 욕조를 제단으로, 펜을 성물로 변환한 정치적 이미지의 극치. 그러나 나폴레옹이 실각한 뒤, 다비드는 브뤼셀로 망명했다. 혁명의 붓은 제국과 함께 유배되었다.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 스승을 넘어선 이단자
Jean-Auguste Ingres
Jean-Auguste Ingres (1780–1867)
앵그르는 다비드의 제자였다. 그러나 스승이 추구한 도덕적 엄격함 대신, 앵그르는 표면의 완벽함을 추구했다. 그의 그림에서 살결은 실제보다 더 매끄럽고, 천의 질감은 실제보다 더 고요하며, 선(線)은 어떤 감정적 떨림도 없이 완벽하게 흐른다. 비평가들은 이것을 ‘차갑다’고 비난했고, 앵그르는 그 차가움이 자신의 강점이라고 반박했다.
1814년 작 〈그랑 오달리스크(La Grande Odalisque)〉는 앵그르의 복잡성을 가장 잘 드러낸다. 등을 돌린 채 누운 여인의 몸은 해부학적으로 불가능하다 — 척추가 세 개 더 많아야 가능한 길이다. 당대 비평가들이 이 점을 지적했을 때, 앵그르의 대답은 단호했다. “나는 의학 교과서를 그리는 게 아니다.” 그에게 이상적 아름다움은 자연을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 조각의 이상화된 비례처럼.
“선이 모든 것이다. 선이 아름다움 자체다. 자연은 선을 그리지 않는다. 그러나 선 없이는 어떤 표현도 없다. 조각, 회화, 건축, 모든 예술의 토대는 선이다.”
—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
앵그르는 87세까지 살았고, 그의 긴 생애 동안 미술계의 보수파 수장으로 군림했다. 낭만주의의 선두 주자 들라크루아와의 대립은 19세기 프랑스 미술의 가장 유명한 논쟁이 되었다 — 선의 화가 대 색채의 화가, 고전주의 대 낭만주의. 그러나 역설적으로 앵그르는 자신이 신고전주의 화가로 분류되는 것을 싫어했다. 그는 스스로를 단지 ‘라파엘로의 추종자’라고 불렀다. 어쩌면 그의 진짜 야심은 신고전주의보다 훨씬 큰 것 — 회화의 영원한 원리 그 자체 — 에 있었는지 모른다.
안토니오 카노바: 대리석에서 꿈을 깎아낸 자
Antonio Canova
Antonio Canova (1757–1822)
1793년, 베네치아 출신의 조각가 카노바는 로마 작업실에서 하나의 군상(群像)을 완성했다. 에로스가 죽은 프시케 위로 몸을 기울여 그녀를 깨우는 순간. 두 신이 공중에서 엇갈린 팔이 만들어내는 X자 형태는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을 멈추게 한다. 〈에로스의 키스로 깨어나는 프시케(Psyche Revived by Cupid’s Kiss)〉 — 이 작품 하나로 카노바는 당대 유럽 최고의 조각가 지위에 올랐다.
카노바의 위대함은 대리석이 살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기술에 있었다. 그는 대리석을 최종 단계까지 직접 연마하면서, 표면에 미묘한 온기와 투명감을 부여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완성된 작품은 밀랍처럼 빛을 흡수하고 발산했다. 관람자들은 종종 손을 뻗어 만져보려 했다 — 그것이 차가운 돌이라는 사실을 믿기 어려워서. 카노바는 물질을 속였다.가장 단단한 것으로 가장 유연한 것을, 가장 차가운 것으로 가장 따뜻한 것을.
카노바는 정치적으로 교묘했다. 나폴레옹의 의뢰를 받아 황제를 벌거벗은 전쟁의 신 마르스로 표현한 조각을 만들었지만, 나폴레옹 자신은 그 작품을 너무 이상화되어 실물과 닮지 않았다며 공개를 꺼렸다. 흥미롭게도 카노바는 나폴레옹의 여동생 폴린 보르게세를 비너스로 조각한 〈보르게세의 비너스〉 (1808)에서는 정반대의 찬사를 받았다. 주문자가 기꺼이 전시를 허락한 이 누드 초상은 오늘날 신고전주의 조각의 걸작으로 꼽힌다.
“나는 고대인들을 모방하지 않는다. 나는 고대인들이 자연을 바라보았던 그 눈으로 자연을 바라본다. 그것이 내가 그들에게서 배운 전부다.”
— 안토니오 카노바
1815년 워털루 이후, 카노바는 조각가로서는 드물게 외교관 역할을 맡았다. 나폴레옹이 이탈리아에서 약탈해간 수백 점의 예술품을 되돌려 받기 위해 교황청의 특사 자격으로 파리를 방문한 것이다. 그의 협상 결과로 많은 작품들이 로마와 피렌체로 돌아왔다. 대리석을 깎던 손이 빼앗긴 유산을 되찾은 것이다.
세 가지 고전주의, 세 가지 접근
| 구분 | 자크루이 다비드 | 장오귀스트 앵그르 | 안토니오 카노바 |
|---|---|---|---|
| 장르 | 회화 | 회화 | 조각 |
| 고전의 쓰임 | 정치적 이상의 근거 | 이상미의 원천 | 자연 관찰의 방법 |
| 핵심 어휘 | 덕목, 공화주의, 희생 | 선, 이상화, 표면 | 살결, 감각, 순간 |
| 시대 관계 | 혁명과 제국 사이 | 낭만주의에 맞선 보수 | 정치를 초월한 조각가 |
| 대표작 | 호라티우스의 맹세 | 그랑 오달리스크 | 에로스와 프시케 |
세 사람을 하나로 묶는 것은 ‘고대’라는 공통된 참조점이지만, 그들이 고대에서 찾은 것은 서로 달랐다. 다비드는 공화주의적 덕목을, 앵그르는 이상화된 선의 순수함을, 카노바는 자연을 바라보는 관찰의 눈을 찾았다. 역설적으로 세 사람 중 고대를 가장 직접적으로 ‘모방’하지 않은 카노바의 조각이 가장 고대적으로 보인다. 앵그르의 그림이 분명히 19세기 화가의 것으로 보이는 반면, 카노바의 대리석 앞에서 관람자는 그것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한 순간 잊어버린다.
신고전주의는 종종 ‘복고주의’로 오해된다. 그러나 다비드가 혁명의 용기를 고대 로마에서 길어올렸을 때, 그것은 과거로의 도피가 아니라 당대 문제에 대한 가장 절박한 응답이었다. 앵그르가 라파엘로를 경배하면서도 들라크루아와 치열하게 싸운 것은, 그가 현재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현재의 예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카노바가 약탈된 문화재를 되찾기 위해 파리로 달려간 것은, 고대가 단순한 미적 영감이 아니라 공동체의 정체성 그 자체라는 믿음에서였다.
혁명은 언어를 필요로 했고, 그 언어를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빌려왔다. 다비드, 앵그르, 카노바는 그 번역자들이었다 — 2천 년 전 지중해의 이상을 18~19세기 유럽의 캔버스와 대리석 위에 되살린 자들. 그들이 불러낸 고대는 결코 낡은 것이 아니었다. 자유, 이성,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열망이 언제나 살아있는 한, 그 이상은 어느 시대에든 부활할 수 있다는 증거였다.
대표 작품
- 자크루이 다비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1784), 〈마라의 죽음〉 (1793),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1801), 〈나폴레옹 대관식〉 (1807)
-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 〈목욕하는 여인〉 (1808), 〈그랑 오달리스크〉 (1814), 〈루이 베르탱의 초상〉 (1832), 〈터키 욕탕〉 (1862)
- 안토니오 카노바: 〈에로스의 키스로 깨어나는 프시케〉 (1793), 〈페르세우스〉 (1804), 〈보르게세의 비너스〉 (1808), 〈세 미신〉 (1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