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가을, 파리의 그랑 팔레에서 열린 살롱 도톤(Salon d'Automne) 전시실 한가운데에 르네상스풍 소형 조각상이 놓여 있었다. 비평가 루이 복셀은 그것을 보고 혀를 찼다. “도나텔로가 야수들 사이에 갇혔군.” 조각상 주변을 가득 채운 그림들 — 나무는 파랗고, 하늘은 주황이며, 피부는 초록과 노랑으로 뒤덮인 그 그림들에게 복셀은 ‘포브(fauves, 야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롱이었다. 그러나 그 이름은 살아남았고, 그 조롱은 예술사의 한 장이 되었다.
야수파(Fauvisme)는 20세기 회화의 첫 번째 혁명이었다. 색채를 대상의 재현에서 해방시킨다 — 나무가 파란 것은 나무가 실제로 파래서가 아니라, 화가가 그렇게 느끼기 때문이다. 인상파가 빛의 포착에 집착했고, 후기 인상파가 색에 심리적 의미를 부여했다면, 야수파는 한 발 더 나아갔다. 색은 이제 표현 그 자체다. 묘사의 도구가 아니라, 감정의 언어다. 이 선언의 중심에 세 사람이 있었다 — 앙리 마티스, 앙드레 드랭, 모리스 드 블라맹크.
야수들의 자화상
앙리 마티스 (1869–1954) · 프랑스 노르 출생 · 《모자를 쓴 여인》(1905), 《삶의 기쁨》(1906) — 색채로 행복을 설계한 자
앙드레 드랭 (1880–1954) · 프랑스 샤투 출생 · 《콜리우르의 항구》(1905), 《채링 크로스 브리지》(1906) — 가장 대담한 실험자
모리스 드 블라맹크 (1876–1958) · 프랑스 파리 출생 · 《부지발의 레스토랑》(1905), 《붉은 나무들》(1906) — 본능으로 붓을 든 야수
마티스: 기쁨을 색으로 증명하다
1869–1954
앙리 마티스가 처음 붓을 잡은 것은 스물한 살, 맹장 수술 후 요양하던 중이었다. 법률 사무소의 서기였던 그에게 어머니가 물감 상자를 건넸다. 이후 그는 파리로 올라가 귀스타브 모로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웠다. 모로는 이 늦깎이 제자를 보며 말했다고 전해진다. “당신은 회화를 단순화시킬 운명이오.” 예언은 맞았다.
1905년 여름, 마티스는 지중해 연안 마을 콜리우르로 향했다. 함께한 사람이 앙드레 드랭이었다. 그 여름, 두 사람은 서로의 눈 앞에서 색채를 완전히 풀어놓았다.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La Femme au chapeau)》은 그해 살롱에서 가장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아내 아멜리의 얼굴이 초록과 주황, 보라로 뒤덮였다. 관객들은 분노했다. 누군가 그림을 찢으려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결국 미국의 수집가 거트루드 스타인이 이 작품을 구매했다. 스캔들이 전설이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색을 있는 그대로의 색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할 뿐이다.”
— 앙리 마티스
마티스의 야수파는 결코 파괴를 위한 파괴가 아니었다. 그의 색채 혁명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 기쁨. “나는 지친 사업가가 안락의자에 앉아 쉬듯, 그림 앞에서 마음이 편안해지기를 바란다”고 그는 말했다. 이 선언이 뜻밖으로 들리는 이유는, 그 ‘편안함’을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이 당대의 눈에는 너무나 폭력적이었기 때문이다. 마티스에게 행복은 화사한 색채였고, 그 색채를 화폭에 터뜨리는 것이 그의 삶이었다. 말년에 류머티즘으로 붓을 쥐기 어려워지자, 그는 가위로 색종이를 오려 붙이는 컷아웃 기법을 개발했다. 몸이 허락하지 않아도 색채를 향한 욕망은 멈추지 않았다.
드랭: 가장 대담했던 실험자의 후퇴
1880–1954
앙드레 드랭은 야수파 운동에서 가장 극적인 인물이다 — 가장 대담하게 달려갔다가, 가장 빠르게 물러섰기 때문이다. 1905년 콜리우르에서 마티스와 함께한 여름과 이듬해 런던에서 그린 템스 강 연작은 야수파의 정점이었다. 《채링 크로스 브리지》에서 강물은 주황과 파랑으로 출렁이고, 증기 연기는 초록빛이다. 실제 런던의 잿빛 하늘과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드랭의 런던은 실제보다 더 강렬하게 살아 있었다.
화상(畵商) 앙브루아즈 볼라르는 드랭을 런던으로 보내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모네가 본 것과 다른 것을 그려오게.” 드랭은 그 주문에 완벽하게 답했다. 모네의 안개와 빛 대신, 드랭의 런던에는 원색이 충돌한다. 그 그림들은 파리로 돌아와 열렬한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야수파가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할 무렵 드랭은 방향을 바꾸었다. 세잔을 재발견하고, 르네상스 거장들을 연구하며 점점 고전적 화풍으로 회귀했다. 야수파 시절 동료들은 그것을 배신으로 불렀다. 드랭은 침묵했다.
“그것은 불과 화약으로 색채를 다루는 시대였다. 나는 두려웠다 — 그 색채들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 앙드레 드랭 (훗날의 회상)
드랭의 후반기는 논쟁의 대상이다.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의 초청으로 베를린을 방문한 일이 오점으로 남았고, 전후 그의 명성은 크게 실추되었다. 하지만 1905년과 1906년의 드랭은 의심할 여지 없이 혁명의 한복판에 있었다. 콜리우르의 여름을 마티스와 함께 보내지 않았다면, 그 두 사람의 서로를 향한 자극 없이는 야수파의 폭발이 그토록 강렬했을지 알 수 없다.
블라맹크: 튜브에서 바로, 캔버스로
1876–1958
모리스 드 블라맹크는 자랑스럽게 선언했다. “나는 루브르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실제로는 약간의 과장이었지만, 그 정신만큼은 진짜였다. 블라맹크는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다. 정규 미술 교육 없이, 전통의 무게 없이. 그는 자전거 레이서였고, 바이올린 교사였으며, 무정부주의자였다. 예술도 그런 식으로 했다 — 본능으로, 규칙 없이.
블라맹크가 드랭을 만난 것은 1900년, 기차 사고 현장에서였다. 두 사람은 같은 객차에 탔다가 탈선 사고를 함께 겪었고, 이후 절친이 되어 샤투의 작업실을 공유했다. 블라맹크의 색채는 세 명 중 가장 폭력적이었다. 그는 물감을 팔레트에서 섞지 않고 튜브에서 곧장 캔버스에 짰다. 빨강은 그냥 빨강이었고, 파랑은 그냥 파랑이었다. 중간 색조 따위는 없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을 처음 본 날, 블라맹크는 마치 자신의 아버지를 만난 것 같다고 말했다. 고흐의 격렬한 붓질과 원색 사용이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을 먼저 해놓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야수파 이후 블라맹크 역시 변했다. 그러나 드랭과 달리 고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점차 어두운 풍경화로 이동했다 — 폭풍 전야의 하늘, 음산한 겨울 마을. 야수의 색채는 사라졌지만 격렬함은 남았다. 쿠르베나 피사로를 닮은 후반기의 블라맹크를 두고 비평가들은 실망했다. 그러나 블라맹크는 개의치 않았다. “나는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그린다”고 그는 말했다. 야수파 시절의 함성도, 노년의 침묵도 — 그에게는 같은 태도의 다른 표현이었다.
같은 폭발, 세 가지 온도
세 사람은 1905년 같은 무대에서 함께 폭발했다. 그러나 그 이후의 궤적은 완전히 달랐다. 마티스는 평생 색채를 향한 항해를 멈추지 않았다. 드랭은 되돌아섰다. 블라맹크는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야수파가 ‘운동’으로서 지속된 기간은 불과 3년(1905~1908)이었다. 그러나 그 3년이 남긴 충격파는 20세기 미술 전체에 울려 퍼졌다.
마티스
기쁨의 건축
색채는 감정의 언어이며, 그 감정은 기쁨이다. 야수파 이후에도 평생 색채 탐구를 계속한 유일한 창시자.
드랭
폭발과 후퇴
가장 대담한 실험으로 달려갔다가 가장 빠르게 고전으로 돌아섰다. 야수파의 순수한 에너지를 가장 짧게 지녔던 자.
블라맹크
본능의 순수성
전통 없이, 팔레트 없이, 튜브에서 직접. 규칙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규칙을 거부한 야수 중의 야수.
“1905년 살롱 도톤을 보고 나온 사람들은 자신들이 본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았다. 불안했기 때문이다.”
— 존 레발드, 미술사가
야수가 열어놓은 문
야수파는 길지 않았다. 1908년 무렵 대부분의 화가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 큐비즘으로, 표현주의로, 고전주의로. 그러나 야수파가 남긴 것은 단순한 색채 실험이 아니었다. ‘색은 대상을 묘사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선언은 이후 20세기 미술의 모든 추상 실험을 정당화하는 논리적 기반이 되었다. 칸딘스키가 순수 추상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 독일 표현주의자들이 내면의 감정을 색으로 폭발시킬 수 있었던 것 — 그 문을 야수들이 먼저 열었다.
마티스는 1954년, 여든다섯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마지막 몇 년은 침대에서 보냈지만, 그 침대에서도 조수들에게 색종이를 오려 붙이게 하며 작업을 이어갔다. 드랭은 같은 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블라맹크는 1958년, 농촌의 자신의 집에서 조용히 생을 마쳤다. 세 사람이 모두 사라진 해에, 그들이 함께 만든 1905년 여름은 이미 신화가 되어 있었다.
콜리우르는 지금도 작은 항구 마을이다. 여름이면 예술가 지망생들이 마티스와 드랭이 이젤을 세웠던 자리를 찾아온다. 지중해의 빛은 여전히 그 계절에 지나치게 강렬하다. 그 빛 아래에서 캔버스를 펴고 앉으면, 색이 그냥 있는 그대로만 보이지 않는 순간이 온다고 한다. 그 순간 — 눈에 보이는 것과 마음이 느끼는 것이 다를 수 있다는 깨달음 — 이 야수파가 남긴 가장 오래된 유산이다.
다음번에 마음이 울적할 때 마티스의 그림을 한번 보라. 색이 먼저 들어오고, 그 다음에 기쁨이 온다. 순서가 생각과 반대다. 그것이 마티스의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