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네덜란드는 이상한 나라였다. 왕이 없었고, 귀족이 권력을 독점하지 않았다. 대신 암스테르담 항구를 오가는 향신료와 청어와 견직물이 나라를 먹여 살렸다. 상인들이 부를 쌓았고, 그 부가 문화를 길렀다. 그리고 그 황금시대(Gouden Eeuw)의 한복판에서 세 명의 화가가 빛을 다루는 방법을 완전히 다르게 발명했다. 렘브란트는 어둠 속에서 빛을 끌어냈고, 베르메르는 창문 하나로 세계를 만들었으며, 프란스 할스는 순간을 영원으로 붙잡았다.
세 사람은 서로 만난 적이 없었다.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에, 베르메르는 델프트에, 할스는 하를럼에 살았다. 각자의 도시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17세기 네덜란드의 삶을 캔버스에 새겼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그 시대를 떠올릴 때 눈앞에 펼쳐지는 것들 — 인간의 내면을 꿰뚫는 눈빛, 창가에 앉은 여인의 고요함, 한껏 웃고 있는 남자의 활기 — 은 모두 이 세 사람이 만든 이미지다.
황금시대의 세 얼굴
렘브란트 판 레인 (1606–1669) · 레이던 출생, 암스테르담 활동 · 《야경》(1642), 《자화상》연작 — 빛과 어둠으로 영혼을 그린 자
요하네스 베르메르 (1632–1675) · 델프트 출생·활동 ·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1665), 《우유 따르는 여인》(1658) — 침묵 속의 완벽한 순간
프란스 할스 (1582–1666) · 안트베르펜 출생, 하를럼 활동 · 《웃고 있는 기사》(1624), 《하를럼 양로원 여성 이사들》(1664) — 생동하는 찰나를 포착한 자
렘브란트: 어둠에서 건져 올린 빛
1606–1669
렘브란트가 즐겨 쓴 기법에는 이름이 있다 —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이탈리아어로 ‘밝음과 어둠’. 카라바조가 발명한 이 기법을 렘브란트는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의 그림에서 빛은 단순히 사물을 보이게 하지 않는다. 빛은 선택한다. 어둠 속에서 얼굴 하나, 손 하나, 주름 하나를 집어 올린다. 나머지는 어둠에 돌려준다. 그렇게 렘브란트의 빛은 감독처럼 주의를 지휘한다.
1642년, 렘브란트는 당시 가장 규모가 크고 값비싼 작품을 완성했다. 암스테르담 민병대 대장 프란스 바닝 코크와 그의 부대원들을 그린 《야경(De Nachtwacht)》이다. 의뢰인들은 실망했다. 저마다 잘 보이게 그려달라고 돈을 냈는데, 어떤 인물은 그림자에 묻히고 어떤 인물은 서로에게 가려졌다. 군상화(群像畵)의 관례는 모든 인물을 동등하게 배열하는 것이었다. 렘브란트는 그것을 무시했다. 대신 움직임과 빛을 화면에 집어넣어, 회화가 아니라 거의 연극 한 장면처럼 만들었다. 당대에는 혹평받았지만, 지금 그 작품은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의 심장이다.
“그림이란 완성되었을 때, 화가의 의도가 충분히 표현된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렘브란트 판 레인
렘브란트 인생의 후반부는 거의 비극이었다. 아내 사스키아가 세상을 떠났고, 방만한 생활과 과도한 수집 취미로 파산을 맞이했다. 1656년, 그는 공식적으로 파산 선고를 받고 집과 소장품을 경매에 내놓아야 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그린 자화상들은 오히려 가장 깊어진다. 젊은 시절의 자화상에는 빛이 있고 야망이 있다. 말년의 자화상에는 대신 무언가 다른 것이 있다 — 변명하지 않는 눈빛, 세월을 숨기지 않는 주름. 그는 평생 100점이 넘는 자화상을 남겼다. 그것은 자기 과시가 아니라 끊임없는 내면 탐구였다.
베르메르: 창문 하나로 만든 세계
1632–1675
요하네스 베르메르는 현존하는 작품이 35점 남짓이다. 렘브란트가 600점 이상을 남긴 것과 비교하면 믿기 어려울 만큼 적다. 그는 천천히 그렸다. 한 해에 두세 점 남기기도 어려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작업 방식이다 —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를 활용한 것으로 강하게 의심된다. 작은 방 안에 빛이 통하는 구멍을 만들어 외부 풍경을 벽이나 천에 투사한 뒤, 그 이미지를 치밀하게 옮겨 그리는 방식이다. 그 결과로 나온 그림의 빛은 사진과 닮았다. 초점이 맞지 않은 듯한 가장자리, 빛을 받은 물체 표면의 미묘한 번짐 — 베르메르의 그림에는 렌즈의 눈이 담겨 있다.
그러나 기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베르메르가 포착한 ‘순간’의 성격이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혼자다. 편지를 읽거나, 악기를 연주하거나, 창밖을 바라보거나, 우유를 따른다. 어떤 극적인 사건도 없다. 서사가 없다. 그러나 바로 그 고요함 때문에 그의 그림은 보는 사람을 그 공간 안으로 끌어당긴다. 1665년경 그린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Meisje met de parel)》는 배경이 완전한 어둠이다. 소녀는 고개를 돌려 보는 이를 바라본다. 입이 살짝 열려 있다. 말을 하려는 것인지, 말을 멈춘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모호함이 4세기 동안 사람들을 그 앞에 멈춰 서게 한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아무것도 없는 순간을 그렸다. 그런데 그 아무것도 없음이 전부다.”
— 로렌스 고잉, 미술사가
베르메르의 또 다른 비밀은 색이다. 그가 즐겨 쓴 파란색 — 라피스 라줄리에서 추출한 울트라마린 — 은 당시 금보다 비쌌다. 그는 그 값비싼 파랑을 아끼지 않았다. 《우유 따르는 여인》의 에이프런이 그 파랑이고,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머리 스카프가 그 파랑이다. 베르메르는 43세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11명의 아이를 남겼고 빚도 남겼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약 200년간 그의 이름은 거의 잊혔다. 19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미술사가들이 그의 작품들을 재발견하고 진가를 알아봤다. 걸작은 때로 시대보다 늦게 도착한다.
프란스 할스: 웃음을 영원으로 만든 자
1582–1666
17세기 유럽 초상화의 법칙은 엄격했다 — 인물은 위엄 있게, 표정은 절제되게. 그것이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을 기록하는 방식이었다. 프란스 할스는 그 법칙을 정면으로 어겼다. 《웃고 있는 기사(De Lachende Cavalier)》(1624)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남자는 웃고 있다. 정확히는 방긋 웃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 비스듬하게 웃고 있다.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가 있고 눈에는 장난기가 있다. 18세기와 19세기 화가들이 이 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은 이유는 단순하다 — 그림 속 인물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할스가 그림을 빠르게 그렸다는 것은 당대 기록에도 남아 있다. 그의 붓질은 완성을 향해 다듬어지지 않는다. 가까이서 보면 거칠고 성급해 보이기까지 하는 붓 자국들이, 멀어지면 생생한 피부와 옷감과 표정이 된다. 이것은 기술이 아니라 철학이다 — 순간은 공들여 완성할 수 없다. 순간을 포착하려면 순간처럼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19세기 인상주의자들, 특히 에두아르 마네가 할스에게 깊이 빚졌다고 고백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할스의 마지막 작품들은 그러나 전혀 다른 분위기다. 1664년 완성한 《하를럼 양로원 여성 이사들》을 보면, 이제 화면에는 웃음이 없다. 여성들의 눈빛은 냉정하고, 구도는 엄격하며, 색조는 어둡다. 당시 할스는 80대 초반으로 스스로도 양로원에서 지원을 받으며 살고 있었다. 그림의 의뢰인들이 사실상 자신의 후원자이기도 했던 셈이다. 그 묘한 역전 속에서 할스는 생애 가장 냉혹한 그림을 그렸다. 거기에는 웃음의 야수가 아니라, 삶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노인이 있었다.
같은 시대, 세 가지 빛
세 사람은 모두 빛을 다루었지만 각자가 의미하는 ‘빛’은 달랐다. 렘브란트의 빛은 심리적이다 — 어둠과 대비되어 내면을 드러낸다. 베르메르의 빛은 물리적이다 — 창문을 통해 들어와 공간과 사물에 쌓인다. 할스의 빛은 시간적이다 — 눈 깜짝할 사이 스쳐 지나가는 찰나를 붙잡는다. 그리고 세 가지 빛은 모두 한 가지 질문으로 수렴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어떤 느낌인가?”
렘브란트
영혼의 해부학
어둠을 재료로 삼아 내면을 조각했다. 파산과 상실 이후 더 깊어진 붓으로 인간의 존엄을 증명했다.
베르메르
고요의 건축
창 하나, 인물 하나, 행위 하나. 그 최소한의 재료로 영원이 될 순간을 만들었다.
프란스 할스
순간의 포획
빠른 붓질로 빠른 삶을 잡아냈다. 인상주의가 탄생하기 200년 전에 이미 그 정신으로 그렸다.
“네덜란드 황금시대 화가들은 신화나 성경을 그리지 않았다. 그들은 우유를 따르는 여인을, 웃고 있는 이웃을, 늙어가는 자신의 얼굴을 그렸다. 그것이 더 대담한 선택이었다.”
— 사이먼 샤마, 《렘브란트의 눈》 中
황금시대가 남긴 것
네덜란드 황금시대는 17세기 후반부터 서서히 저물었다. 영국과의 전쟁, 프랑스의 침공, 교역로의 변화. 그러나 그 시대 화가들이 발명한 것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렘브란트의 심리적 조명은 이후 모든 초상화의 기준이 되었다. 베르메르의 일상성 — 거창하지 않은 삶의 한 조각이 예술의 주제가 될 수 있다는 선언 — 은 19세기 사실주의와 20세기 사진의 기반이 되었다. 할스의 즉흥적 붓질은 마네를 거쳐 인상주의로 이어졌다.
세 사람 중 누구도 생전에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 렘브란트는 파산했고, 베르메르는 빚을 남기고 죽었으며, 할스는 양로원의 도움으로 말년을 보냈다. 그들의 위대함은 오히려 죽은 후에 완성되었다. 역사가 그림을 다시 읽었을 때, 그 그림들이 비로소 완전한 의미로 열렸다.
오늘날 렘브란트의 《야경》 앞에는 매일 수천 명이 서고,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보기 위해 헤이그의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에 줄이 선다. 할스의 그림들이 걸린 하를럼의 프란스 할스 미술관은 그가 살았던 도시에 그대로 있다. 세 사람이 모두 사라진 뒤 350년 이상이 지났지만, 그들이 포착한 빛은 여전히 살아 있다. 어쩌면 그것이 연금술이다 — 사라질 순간을 사라지지 않는 것으로 바꾸는 기술.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서 《야경》을 처음 본 사람들은 대부분 그 크기에 먼저 압도된다고 한다. 3.6미터 높이의 캔버스. 그러나 잠시 후 눈은 자연스럽게 한 곳으로 향한다 — 빛 속에 서 있는 소녀의 얼굴로. 렘브란트는 그것을 알았다. 어둠이 클수록 빛은 더 강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