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0년대 파리, 런던, 드레스덴. 세 도시에서 세 화가가 거의 동시에 같은 질문을 붙들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캔버스 위에서 인간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그림 한 장이 폭풍 앞에 선 사람처럼, 벼랑 끝에 선 사람처럼, 숨이 막히도록 거대한 무언가 앞에 선 사람처럼 느끼게 만들 수 있는가?
그들이 공통으로 찾아낸 답은 하나였다 — 숭고(sublimity). 18세기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가 이름 붙이고, 칸트가 분석한 그 개념. 아름다움이 즐거움이라면, 숭고는 두려움 섞인 경이다. 너무 크고 너무 강해서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 앞에서 오히려 내면이 열리는 감각. 들라크루아는 그것을 역사의 격류에서 찾았고, 터너는 빛과 기상 속에서, 프리드리히는 고독한 풍경 속에서 찾았다.
낭만주의의 세 얼굴
외젠 들라크루아 (1798–1863) · 파리 활동 ·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1827) — 격정의 색채 혁명가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1775–1851) · 런던 활동 · 《비, 증기, 속도》(1844), 《전함 테메레르》(1839) — 빛 속으로 사라진 세계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1774–1840) · 드레스덴 활동 ·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1818), 《얼음 바다》(1823–24) — 침묵과 고독으로 무한을 그린 자
들라크루아: 역사를 불태운 색채
1798–1863
1830년 7월, 파리의 거리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샤를 10세를 몰아낸 사흘간의 봉기. 들라크루아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화실로 돌아가 붓을 들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La Liberté guidant le peuple)》이다.
그 그림에는 이상한 점이 있다. 자유의 여신은 실제 여성도 아니고 신화의 존재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다. 맨가슴에 프리기아 모자를 쓰고 총과 삼색기를 든 채 시신들을 밟고 앞으로 나아간다. 옆에는 피스톨을 든 소년, 장총을 든 부르주아 신사, 그리고 죽어가는 자들이 뒤엉켜 있다. 이 혼돈을 들라크루아는 정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혼란스럽게, 더 뜨겁게, 더 어지럽게 쏟아냈다.
“나는 조국을 위해 싸우지 않았다면 적어도 조국을 위해 그릴 것이다.”
— 외젠 들라크루아
들라크루아의 진정한 혁명은 색채 사용에 있었다. 당시 신고전주의의 지배자 앵그르는 색보다 선이 우선이라고 가르쳤다. 윤곽선이 형태를 만들고, 색은 그것을 채우는 보조다. 들라크루아는 정반대였다. 그에게 색은 선보다 더 직접적으로 감정에 닿는 언어였다. 빨강 옆에 녹색을 두면 두 색이 서로를 더 강렬하게 만든다 — 나중에 과학자 슈브뢸이 증명한 보색 대비 원리를, 들라크루아는 감각으로 먼저 알았다. 그리고 그것은 이후 인상파 화가들에게 물려진 핵심 유산이 되었다.
1832년, 들라크루아는 모로코를 여행했다. 외교 사절단을 따라간 그 여행이 그의 세계를 넓혔다. 아프리카의 태양 아래 선명하게 반짝이는 색들, 유럽과 전혀 다른 구도와 인물들. 귀국 후 그는 수첩에 빼곡히 적은 메모와 스케치를 바탕으로 수십 년 동안 오리엔탈리즘 주제를 그렸다. 여기에는 당시 유럽의 제국주의적 시선이라는 그늘도 있지만, 동시에 순수한 미적 경이가 담겨 있다. 들라크루아는 아프리카에서 중세 그리스를 보았다고 말했다 — 변하지 않는 어떤 인간적 장대함.
터너: 빛 속으로 녹아든 세계
1775–1851
1842년 어느 겨울,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는 한 가지 실험을 했다. 눈보라 속을 달리는 증기선 갑판에 자신을 밧줄로 묶어달라고 했다. 네 시간 동안. 그것이 사실인지 전설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터너가 그림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그는 숭고를 관찰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 안에 서고 싶었다.
터너의 그림에서 세계는 점점 단단한 윤곽을 잃어간다. 초기 작품에는 명확한 구도와 세부 묘사가 있다. 그러나 1830년대 이후, 그의 캔버스는 빛의 소용돌이가 된다. 《비, 증기, 속도(Rain, Steam and Speed)》(1844)는 증기 기관차를 그린 것인지 폭풍 속을 그린 것인지 처음 보면 구별이 어렵다. 다리는 있고, 기관차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빛과 증기와 빗속으로 녹아들어 경계가 사라진다. 20세기 추상화의 예고가 이미 여기 있었다.
“나는 이해받기 쉬운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나는 그림이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기를 원한다 — 자연이 그러하듯이.”
— J.M.W. 터너
1839년 완성한 《전함 테메레르(The Fighting Temeraire)》는 다르다. 트라팔가 해전의 영웅, 영국 해군을 구한 전함이 낡아 고철로 팔려가며 예인선에 끌려가는 장면이다. 붉은 황혼 속에서 흰 범선은 유령처럼 빛나고, 그 앞을 검고 작은 증기선이 이끌고 있다. 영국인들은 이 그림 앞에서 울었다. 과거의 영광과 새로운 시대의 냉혹함이 교차하는 그 석양 속에서. 훗날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그림으로 꼽는 이 작품은 단순히 배 한 척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어떻게 끝을 맞는지에 대한 그림이다.
터너는 평생 2만 점이 넘는 수채화, 스케치, 유화를 남겼다. 그는 거의 매년 영국 각지와 유럽을 여행하며 빛과 날씨를 기록했다. 베네치아를 40번 이상 방문했다는 설도 있다. 그에게 여행은 취재였고 빛은 주제였다. 말년에는 첼시 강가의 작은 집에서 ‘미스터 부스’라는 가명으로 살다가 숨졌다. 유언으로 그는 자신의 작품 전부를 국가에 기증했다. 조건이 하나 있었다 — 반드시 함께 전시되어야 한다는 것.
프리드리히: 뒤를 돌아선 자의 철학
1774–1840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그림에서 인물들은 대부분 뒤를 보고 있다.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Wanderer above the Sea of Fog)》의 남자도, 《달을 바라보는 두 남자》의 인물들도, 바다를 향해 서 있는 수도사도. 미술사는 이것을 ‘Rückenfigur’라 부른다 — 뒤를 향한 인물. 이 기법은 단순한 구도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초대다.
인물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때, 보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자신을 투영한다. 저 사람이 보는 것을 나도 본다. 저 사람이 느끼는 것을 나도 느낀다. 프리드리히는 그림 속 인물을 관람자의 대리인으로 만들었다. 그의 그림 앞에서 우리는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풍경 앞에 서는 경험을 한다.
“화가는 눈앞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 보는 것도 그려야 한다. 내면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눈앞에 보이는 것도 그리지 말아야 한다.”
—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프리드리히의 풍경에는 이상한 고요가 있다. 그것은 평화로운 고요가 아니다. 뭔가가 이미 지나가버린 후의 고요, 혹은 뭔가가 오기 직전의 고요. 《얼음 바다(Das Eismeer)》(1823–24)를 보면 그 감각이 극에 달한다. 북극해의 얼음판들이 충돌해 치솟아 있고, 그 밑에는 배의 잔해가 깔려 있다. 생존자는 없다. 극지 탐험의 낭만적 꿈을 산산조각 낸 이 그림 앞에서는 어떤 영웅적 감정도 자리를 찾지 못한다. 자연은 인간의 도전에 응답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거기 있다.
프리드리히의 생전 명성은 기복이 심했다. 1818년 전후에는 독일 낭만주의의 대표 화가로 인정받았지만, 1820년대부터 취향이 변하면서 그의 신비주의적 그림은 시대에 뒤처진 것으로 여겨졌다. 1835년 뇌졸중을 겪고 거의 붓을 놓은 채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20세기에 이르러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과 초현실주의자들이 그를 다시 발견했다. 그의 풍경들이 실은 내면 풍경이었다는 것을, 시대가 한 세기 늦게 이해한 것이다.
같은 시대, 세 가지 숭고
들라크루아, 터너, 프리드리히는 서로 직접적인 교류가 없었다. 그러나 세 사람 모두 이성(理性)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계몽주의에 반발했고, 인간의 감정과 경험이 더 근본적인 진실에 닿는다고 믿었다. 그것이 낭만주의의 핵심이었고, 각자의 숭고는 그 믿음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들라크루아
열정의 숭고
역사와 신화 속 격렬한 장면을 색채로 폭발시켰다. 캔버스는 전쟁터가 되고 감정은 불꽃이 되었다.
터너
소멸의 숭고
형태가 빛 속으로 녹아드는 순간을 포착했다. 세계는 확고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빛과 기상의 흐름 속에 있다.
프리드리히
침묵의 숭고
아무도 없는 풍경 앞에 홀로 선 인간의 고독을 그렸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작아지고, 그 작아짐 속에서 무한이 열린다.
“낭만주의는 양식이 아니라 태도다. 세계가 이성으로 완전히 설명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바로 그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야말로 인간 경험의 핵심이라는 믿음.”
— 이사야 벌린, 《낭만주의의 뿌리》 中
숭고가 남긴 것
세 화가는 각자의 방식으로 이후 미술의 문을 열었다. 들라크루아의 색채 혁명은 고갱과 세잔, 나아가 인상파 전체에 직접 영향을 미쳤다. 르누아르는 들라크루아의 회화를 보러 루브르에 거의 매일 갔다고 했다. 터너의 대기 표현은 인상파가 야외로 나가기 이전에 이미 빛의 현상학을 실천했다. 클로드 모네는 런던에서 터너를 처음 보고 충격을 받았다. 프리드리히의 내면 풍경은 독일 표현주의, 에드바르 뭉크, 그리고 현대의 미니멀한 풍경 사진까지 이어지는 계보의 시작이다.
그러나 세 사람의 가장 근본적인 유산은 기법이 아니라 질문이다. 예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름다운 것을 만드는 것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보는 사람의 내면을 흔들고, 세계 앞에 선 인간의 작음과 위대함을 동시에 느끼게 해야 하는가? 들라크루아, 터너, 프리드리히는 각자의 방식으로 같은 쪽에 답했다. 예술은 숭고해야 한다 — 그것이 불편하더라도.
함부르크 미술관에는 프리드리히의 그림 앞에 한 시간 이상 서 있는 관람객들이 있다고 한다. 이유를 물으면 대부분 비슷한 말을 한다 — 뭔가를 생각하게 된다고. 무엇인지는 각자 다르다. 그것이 숭고의 방식이다. 그것은 정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당신 안의 더 깊은 어딘가를 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