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 트리스탕 차라, 《다다 선언》, 1918
1916년 2월, 취리히의 어느 카바레에서 한 무리의 예술가들이 동시에 시를 낭독했다. 각기 다른 언어로, 각기 다른 텍스트를. 누구도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청중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것이 다다(Dada)였다. 이해받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예술. 아니, 예술이라고 불리기를 거부하는 무언가.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거부는 20세기 예술사에서 가장 강력한 선언 중 하나가 되었다.
다다이즘은 제1차 세계대전의 산물이었다. 수백만 명이 참호 속에서 죽어가던 그 시대에, ‘문명’과 ‘이성’과 ‘예술’을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다다이스트들의 대답은 간단했다. 아무 의미도 없다. 그래서 그들은 의미를 만드는 대신 의미를 파괴했다. 기존의 예술 형식을, 미학적 규범을, 관람객과 예술가 사이의 암묵적 계약을. 이 파괴적 충동의 중심에 세 인물이 있었다 — 마르셀 뒤샹, 트리스탕 차라, 한스 아르프.
반예술의 세 얼굴
마르셀 뒤샹 (1887–1968) · 프랑스 블랭빌 출생 · 《샘》(1917), 《L.H.O.O.Q.》(1919) — 예술의 정의 자체를 폭파시킨 자
트리스탕 차라 (1896–1963) · 루마니아 모이네슈티 출생 · 《다다 선언》(1918), 신문 오려붙이기 시(詩) — 다다의 목소리이자 광대
한스 아르프 (1886–1966) · 알자스 스트라스부르 출생 · 《우연의 법칙에 따른 콜라주》(1916–17), 《별자리》 시리즈 — 우연을 예술의 방법으로 삼은 자
뒤샹: 변기 하나로 예술의 정의를 무너뜨리다
1887–1968
1917년 봄, 뉴욕의 독립미술가협회 전시에 ‘R. Mutt’라는 이름으로 작품이 출품되었다. 작품의 정체는 철물점에서 구입한 도자기 소변기였다. 《샘(Fountain)》이라는 제목이 붙었고, 옆면에는 간단히 서명만 되어 있었다. 전시 주최 측은 거절했다. 뒤샹은 — 사실 그 익명의 출품자가 뒤샹 자신이었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 의도한 결과를 얻었다. 거절당한 것이 곧 논쟁이 되었고, 그 논쟁이 곧 예술이 되었다.
뒤샹이 던진 질문은 단순했다. “예술가가 선택한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예술이 아닌가?” 미술학교에서 가르치는 기술도 없고, 붓질도 없고, 조각도 없다. 그냥 기성품(readymade) 하나를 골라 전시장에 가져다 놓는 것. 이것을 예술이라 부를 수 없다면, 예술과 비예술을 나누는 경계는 어디에 있는가. 뒤샹은 그 경계를 그어줄 사람이 결국 ‘제도’임을 폭로했다. 갤러리, 미술관, 비평가, 수집가 — 그들이 ‘예술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예술이 되는 것이라면, 예술의 가치는 어디서 오는가.
“나는 예술가가 아닌 숨 쉬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예술은 삶이며, 우리 모두는 예술가다 — 원하든 원하지 않든.”
— 마르셀 뒤샹
뒤샹은 레디메이드 이전에도 이미 도발적이었다. 1912년 살롱 드 앵데팡당에 출품한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2》는 인체를 기계적 운동의 시간 연속으로 분해한 작품이었다. 큐비즘과 미래주의를 동시에 흡수하면서도 어느 쪽도 아닌 그 무언가였다. 전시 측은 “누드가 계단을 내려와서는 안 된다”며 철회를 요구했다. 뒤샹은 조용히 작품을 가져갔고, 이듬해 뉴욕의 아모리 쇼에 출품해 미국을 뒤흔들었다. 뒤샹에게 거절은 늘 도약의 발판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뒤샹이 만년에 체스 선수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이다. 예술을 게임처럼 접근했던 그에게, 체스야말로 순수한 지적 게임이었다. “내가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은 체스를 선택한 것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무관심과 철수야말로 그를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 그가 던진 질문은 아직도 답을 기다리고 있다.
차라: 말을 가위로 잘라 시를 만들다
1896–1963
트리스탕 차라는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스물한 살에 취리히의 카바레 볼테르에 나타났다. 그는 다다의 수석 광대이자 선동가였다. 다다 선언을 쓰고, 다다 저널을 편집하고, 공연에서 고함을 치고, 무의미한 소리를 시라 부르며 청중을 도발했다. 차라에게 시는 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었다. 시는 언어 자체를 공격하는 무기였다.
그의 가장 유명한 방법론 중 하나는 ‘신문지 시’였다. 신문 기사를 가위로 잘라 가방에 넣고 흔든 다음, 손을 집어넣어 무작위로 뽑아 순서대로 배열한다. 그것이 시다. 이 방법은 예술 창작에서 ‘의도’와 ‘선택’을 제거한다. 화가가 대상을 선택하고, 구도를 잡고, 색을 고르는 모든 행위가 예술의 핵심이라는 생각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우연이 예술을 만들 수 있다면, 예술가의 ‘재능’은 신화에 불과하다.
“다다는 예술 작품이 아니다. 다다는 삶 자체다. 혹은 삶도 예술도 아닌 것 — 우리는 아직 그것의 이름을 모른다.”
— 트리스탕 차라, 《다다 선언》(1918)
차라의 무대 퍼포먼스는 전설적이었다. 1920년 파리에서 열린 다다 집회에서 그는 청중이 원하는 것과 정반대로 행동했다. 사람들이 조용히 앉아 시를 기다리면 고함을 질렀고, 설명을 요구하면 침묵했다. 한 번은 공연 도중 박수를 받자 그것에 화를 냈다 — 이해받는다는 것 자체가 다다에 대한 배신이었기 때문이다. 이 전략적인 불이해는 관객을 수동적 소비자에서 능동적 반응자로 바꾸었다. 훗날 퍼포먼스 아트와 해프닝(happening)의 씨앗이 그 공연들 속에 뿌려져 있었다.
아르프: 우연을 받아들인 손
1886–1966
한스 아르프(Jean Arp이라고도 불린다)는 알자스 출신으로, 독일어와 프랑스어 사이에서 평생 정체성의 경계를 살았다. 이 중간자적 위치가 그의 예술에도 녹아 있다. 다다이스트였지만 초현실주의와도 깊이 연결되었고, 조각가이자 시인이었으며, 과격한 파괴보다는 조용한 해체를 택했다. 다다의 세 인물 중 아르프는 가장 온기 있는 혁명가였다.
1916년, 아르프는 종이를 손으로 찢어 바닥에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콜라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우연의 법칙에 따른 콜라주(Collages Arranged According to the Laws of Chance)》라는 제목이 붙은 이 작품들은 의도적 구성이 아니라 중력과 우연이 만들어낸 형태를 그대로 화면에 고정한 것이었다. 아르프가 보기에, 예술가의 ‘통제’는 자연의 흐름을 방해할 뿐이었다. 손을 놓아버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창작 방법이었다.
후기의 아르프는 조각으로 이동했다. 그의 3차원 작품들은 특정 대상을 재현하지 않으면서도 생명체의 느낌을 준다 — 부드럽게 부풀어 오른 곡선, 알과 씨앗과 구름을 동시에 연상시키는 형태. 그는 이것들을 ‘콩크레시옹(concrétion)’이라 불렀다. 결정화(結晶化), 혹은 응결(凝結). 우연으로 시작했지만, 자연이 스스로 형태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필연이 태어나는 것. 아르프에게 우연과 필연은 반대말이 아니었다.
같은 거부, 세 가지 방식
세 사람은 모두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의심했다. 그러나 그 의심을 표현하는 방식은 달랐다. 뒤샹은 질문 자체를 무기로 삼았고, 차라는 언어를 폭발시켰으며, 아르프는 손을 내려놓았다. 파괴의 철학자, 언어의 테러리스트, 우연의 수도사 — 같은 시대 같은 운동 안에 이처럼 다른 세 개의 목소리가 있었다.
뒤샹
개념의 폭발
예술을 만들지 않고 예술을 정의하는 행위 자체에 개입했다. 선택이 곧 창조다.
차라
언어의 해체
말에서 의미를 제거했다. 우연으로 짜인 시, 소음으로 이루어진 공연 — 소통 불가능성을 전략으로 삼았다.
아르프
우연의 수용
통제를 포기하는 것이 가장 정직한 창작이라 믿었다. 자연의 흐름이 형태를 결정하게 했다.
“그들이 예술을 거부한 방식이 새로운 예술이 되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니라 역사의 논리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존재는 이름을 갖게 된다.”
— 아서 단토, 미술 철학자
다다가 심어놓은 씨앗
다다이즘은 운동으로서는 짧았다. 1916년에 시작해 1920년대 초반이면 대부분의 다다이스트들은 초현실주의로, 구성주의로, 혹은 완전한 침묵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다다가 남긴 질문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예술가의 의도가 없어도 예술은 성립하는가’, ‘아름다움이 없어도 예술은 가능한가’, ‘예술과 삶의 경계는 누가 긋는가’ — 이 질문들은 이후 100년간 미술사 전체를 관통하며 반복되었다.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팝아트와 개념미술의 직계 조상이다. 앤디 워홀이 수프 캔을 그림으로 만들었을 때, 조지프 코수스가 의자와 의자 사진과 의자의 사전적 정의를 나란히 놓았을 때 — 그 모든 것의 기원에 1917년의 변기가 있다. 차라의 우연한 시는 잭슨 폴록의 드리핑 기법, 존 케이지의 우연 음악(chance music)과 맞닿아 있다. 아르프의 우연 콜라주는 자동기술법(automatism)을 통해 초현실주의로 이어졌고, 그의 부드러운 조각은 20세기 추상 조각의 한 계보를 이루었다.
뒤샹은 1968년,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보다 5년 전 차라가 먼저 눈을 감았고, 아르프는 1966년에 생을 마쳤다. 세 사람이 모두 떠난 뒤 10여 년이 지나, 1980년대의 미술 세계는 뒤샹의 질문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개념미술, 퍼포먼스 아트, 설치미술, 미디어 아트 — 이 모든 현대 예술 형식들은 다다이스트들이 열어놓은 문 어딘가를 통과해 왔다.
카바레 볼테르가 있던 취리히의 골목은 지금도 남아 있다. 그 건물은 현재 다다 뮤지엄으로 사용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것을 제도화에 저항하며 탄생한 운동이 결국 제도화되어 박물관에 보존되었다. 그 역설은 어쩌면 다다이즘이 스스로에게 남긴 마지막 농담일지도 모른다.
현대 미술관에서 캔버스도 없고 물감도 없는 작품 앞에 멈추게 된다면, ‘이게 예술인가’라는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그 질문 자체가 다다의 선물이다. 뒤샹은 그 질문을 당신에게 심어놓기 위해 변기를 전시장에 가져다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