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뉴욕, 한 남자가 슈퍼마켓 진열대에서 영감을 얻어 캔버스를 채웠다. 캠벨 수프 32가지 종류를 그대로, 광고처럼, 아무 감정 없이. 같은 해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만화책 한 컷을 4미터짜리 캔버스에 옮겨 놓았다. 그리고 대서양 건너 브래드포드의 한 청년은 갓 받은 장학금을 들고 로스앤젤레스로 날아가 캘리포니아의 수영장을 그리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따로 움직였다. 그러나 그들이 향한 곳은 같았다 — 예술과 일상 사이에 그어진 선을 지우는 것.
팝아트(Pop Art)라는 이름은 영국 비평가 로렌스 알로웨이가 1950년대 후반 처음 사용했다. 그러나 그 운동을 세계에 알린 것은 1960년대 뉴욕이었다. 추상표현주의가 지배하던 미술계는 번민과 실존으로 가득했다. 캔버스는 화가의 내면을 쏟아내는 전쟁터였다. 팝아트는 그 무거움을 정면으로 거부했다. 코카콜라 병, 할리우드 스타의 얼굴, 만화책 말풍선 — 거리에 넘쳐나는 이미지들이 화이트 큐브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미술관 문지기들은 당혹했다. 그것이 팝아트의 의도였다.
세 화가의 궤적
앤디 워홀 (1928–1987) · 미국 피츠버그 출생 · 《캠벨 수프 캔》(1962), 마릴린 먼로 연작(1962) — 소비사회의 거울
로이 리히텐슈타인 (1923–1997) · 미국 뉴욕 출생 · 《Whaam!》(1963), 《행복한 눈물》(1964) — 만화를 회화로
데이비드 호크니 (1937–) · 영국 브래드포드 출생 · 《더 큰 첨벙》(1967), 《예술가의 초상》(1972) — 팝아트의 서정파
워홀: 공장에서 찍어낸 예술
1928–1987
앤디 워홀의 출발점은 미술관이 아니라 광고 대행사였다. 피츠버그 이민자 가정의 막내로 자란 그는 뉴욕으로 와 구두 광고와 잡지 일러스트를 그리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광고의 언어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 반복, 단순화, 충격. 그 기술을 그대로 순수미술에 가져왔을 때, 결과물은 예술계를 뒤흔들었다.
1962년 뉴욕 페러스 갤러리에서 선보인 《캠벨 수프 캔》 연작은 단순한 도발이 아니었다. 32개의 캔버스에 수프 캔 32종을 나란히 걸어놓은 이 작품은 ‘회화란 무엇을 그려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가장 파격적인 답을 내놓았다. 예술적 감흥? 없다. 붓 터치의 개성? 없다. 대신 슈퍼마켓 진열대의 복제 논리가 갤러리 벽에 그대로 옮겨왔다. 관람객들은 한동안 그것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몰랐다.
“모든 백화점은 미술관이고, 모든 미술관은 백화점이다.”
— 앤디 워홀
워홀은 자신의 작업실을 ‘팩토리(The Factory)’라 불렀다. 실크스크린 공정을 도입해 조수들과 함께 이미지를 대량으로 찍어냈다. 마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마오쩌둥 — 실제 사진에서 가져온 이미지에 선명한 원색을 덧입혀 반복했다. 그것은 의도적이었다. 유명인이란 대중에게 소비되는 이미지일 뿐이고, 예술도 결국 같은 방식으로 소비된다. 워홀은 그 논리를 숨기는 대신 전면에 내세웠다. “15분의 명성”이라는 그의 말은 예언처럼 실현되었다 — 인터넷 이전에, SNS 이전에, 그는 이미 그 세계를 살고 있었다.
리히텐슈타인: 말풍선 속의 회화
1923–1997
전설 같은 일화가 있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아들이 만화책을 가리키며 “아빠는 저렇게는 못 그리잖아”라고 말했다는 것.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리히텐슈타인이 만화 이미지를 캔버스로 옮기기 시작한 1960년 무렵의 정신을 잘 포착한다. 그는 만화를 베낀 것이 아니었다. 맥락을 바꾸었다.
리히텐슈타인의 핵심 기법은 벤데이 점(Ben-Day dots)이었다. 원래 인쇄물에서 색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작은 망점을 그는 손으로 직접 캔버스에 그렸다 — 거대하게, 정교하게. 싸구려 복제 인쇄의 흔적처럼 보이는 그것이 미술관 벽에 걸리는 순간, 보는 사람은 이미지가 아니라 이미지를 만드는 방식을 보게 된다. 1963년 작 《Whaam!》은 전투기 미사일이 폭발하는 장면을 두 패널, 가로 4미터로 펼쳐놓았다. 박물관에서 만나는 역사화의 스케일로 그려진 만화의 한 컷. 그 불일치가 질문이 되었다 — 무엇이 고급 예술이고 무엇이 저급 예술인가?
“나는 만화 작가들과 완전히 다른 일을 한다. 그들은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이미지를 사용하지만, 나는 이미지를 이미지로서 바라보게 만든다.”
— 로이 리히텐슈타인
비평가들은 처음에 리히텐슈타인을 거세게 공격했다. “미국에서 가장 나쁜 화가”라는 평이 나왔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워홀과 함께 팝아트를 정의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그의 논리는 단순하면서도 날카로웠다. 만화는 왜 예술이 아닌가? 누가 그 경계를 그었는가? 그 경계를 다시 그릴 수 있다면, 예술이란 무엇인가? 리히텐슈타인은 질문을 던지되 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 자리를 관람자에게 남겨두었다.
호크니: 빛과 물의 팝아트
1937–
1964년, 데이비드 호크니는 영국 왕립예술대학의 장학금을 손에 쥐고 로스앤젤레스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는 이미 영국 팝아트의 기대주였지만, 캘리포니아가 그에게 준 것은 달랐다. 햇빛, 수영장, 새로운 자유. 브래드포드의 공장 도시에서 자란 청년에게 LA는 말 그대로 다른 세계였다.
《더 큰 첨벙(A Bigger Splash)》은 1967년, 불과 2주 만에 완성되었다. 캘리포니아 주택의 수영장, 누군가 뛰어들어 만든 물보라, 비어 있는 다이빙대.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첨벙 소리만 화면에 남아 있다. 아크릴의 선명한 색과 매끈한 붓질은 사진처럼 보이면서도 사진이 아니다. 워홀이나 리히텐슈타인의 도발적 아이러니와 달리, 호크니의 팝아트는 서정적이었다. 소비사회를 풍자하기보다 그 안에서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하려 했다.
호크니는 동성애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힌 최초의 영국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수영장 그림들에는 젊은 남성들이 등장하고, 그 시선은 솔직하고 따뜻하다. 《예술가의 초상》(1972)은 수영장 안의 남자와 밖의 남자를 그렸다 — 둘의 시선과 거리에서 복잡한 감정의 결이 읽힌다. 그것은 단순히 팝아트의 문법이 아니라, 호크니 자신의 삶이었다. 80대가 된 지금도 그는 아이패드로 풍경을 그린다. 새로운 도구가 나올 때마다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흡수하는 능력. 그것이 호크니를 살아 있는 전설로 만든 이유다.
같은 시대, 세 가지 전략
세 사람은 모두 ‘일상의 이미지’를 예술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그 이유와 방법은 달랐다. 워홀은 소비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되고자 했다. 리히텐슈타인은 고급과 저급의 위계를 해체하려 했다. 호크니는 그 어느 쪽도 아닌 — 단지 자신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을 정직하게 그리고자 했다.
워홀
복제와 소비
예술도 상품처럼 복제된다. 그 논리를 숨기지 않고 전면화함으로써 소비사회의 민낯을 드러냈다.
리히텐슈타인
맥락의 전환
만화를 미술관에 걸어 고급/저급 문화의 경계를 묻는다.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꿨다.
호크니
감각과 서정
도발보다는 포착. 빛, 물, 사람 — 팝아트의 언어로 순간의 아름다움을 붙잡으려 했다.
“팝아트가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이것은 예술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이미지들이 미술사 교과서에 실린다. 결국 예술을 정의하는 것은 미술관이 아니라 시간이다.”
— 로렌스 알로웨이 (팝아트라는 용어를 만든 비평가)
경계가 사라진 자리
팝아트가 예술과 상품의 경계를 허문 이후, 그 자리에 무엇이 들어섰는가. 워홀의 실크스크린이 없었다면 오늘의 아트 굿즈, 콜라보레이션 패션, 한정판 컬렉션의 문법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리히텐슈타인의 만화 미학은 그래픽 디자인과 광고의 언어가 되었다. 호크니가 열어놓은 서정적 팝의 감각은 동시대 회화가 감각적 쾌락을 죄악시하지 않도록 허락해 주었다.
무엇보다 팝아트는 ‘누가 예술을 정의하는가’라는 질문을 남겼다. 미술관이 걸어야 예술인가, 아니면 거리에 붙어 있어도 예술인가. 뱅크시의 그래피티가 경매에서 수백만 달러에 팔리고, 디지털 이미지가 NFT가 되어 거래되는 지금 — 그 질문은 여전히 살아 있다. 워홀, 리히텐슈타인, 호크니가 실제로 해낸 것은 예술 한 점을 만든 게 아니라, 예술을 보는 눈을 바꾼 것이었다.
워홀은 1987년 담낭 수술 중 세상을 떠났다. 59세였다. 리히텐슈타인은 1997년 74세에 뉴욕에서 폐렴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호크니는 아직 붓을 놓지 않았다. 2023년 런던 국립 초상화 갤러리에서 열린 그의 회고전은 수십만 명을 끌어모았다. 87세의 화가가 아이패드로 그린 꽃과 풍경들 앞에서 사람들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60년 전 캘리포니아 수영장을 그리던 청년의 시선이 그 안에 살아 있었다. 여전히 호기심으로 가득 차서.
슈퍼마켓 진열대 앞에 서본 적이 있다면, 워홀의 눈으로 다시 한번 보라. 거기 늘어선 캔들은 그냥 물건이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초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