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베네치아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발표 자리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수상작은 일본 영화 《라쇼몬》이었다. 그 전까지 황금사자상은 유럽의 몫이었다. 심사위원들은 하나의 살인 사건을 전혀 다르게 기억하는 네 명의 증언이 충돌하는 이 작품 앞에서, 영화가 진실에 대해 이렇게 복잡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그렇게 동양을 세계 영화의 지도에 올렸다.
그러나 구로사와 혼자만이 아니었다. 같은 시기 인도 서벵골에서는 사티야지트 레이가 대나무 숲 사이로 기차가 지나가는 장면 하나로 세계를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수십 년 후 타이완에서는 허우샤오시엔이 카메라를 고정한 채 인물들이 화면 밖으로 사라지도록 내버려두며, 기억과 시간의 질감을 스크린에 새기고 있었다. 세 감독, 세 나라, 세 가지 방식으로 동양은 영화에 무언가를 더했다. 그것은 모두 달랐고, 모두 필요했다.
세 감독의 생애
구로사와 아키라 (1910–1998) · 일본 도쿄 출생 · 《라쇼몬》(1950), 《7인의 사무라이》(1954), 《란》(1985) — 베네치아·칸·아카데미 명예상
사티야지트 레이 (1921–1992) · 인도 캘커타 출생 · 아푸 삼부작(1955–1959), 《아란예르 딘 라트리》(1970) — 칸·아카데미 명예상
허우샤오시엔 (1947–) · 타이완 출생 · 《비정성시》(1989), 《자객 섭은낭》(2015) — 베네치아 황금사자상·칸 감독상
구로사와: 폭풍 속에서 인간을 묻다
1910–1998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는 움직임이다. 비와 진흙과 바람, 극단까지 몰린 인물에게서 분출되는 에너지. 《7인의 사무라이》(1954)의 빗속 마지막 전투 장면은 영화사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액션 시퀀스 중 하나다. 슬로우 모션과 망원렌즈와 빗줄기가 뒤섞인 이 장면을 만들기 위해 구로사와는 스태프들에게 실제로 검은 물을 뿌리게 했다. 더 극적으로 보이기 위해서. 그는 현실을 찍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본질을 찍고 싶었다.
그러나 구로사와의 진짜 주제는 액션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동시에 얼마나 위대해질 수 있는가에 대한 탐문이다. 《라쇼몬》에서 하나의 살인 사건은 네 가지 버전으로 제시된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 영화는 끝내 말해주지 않는다. 진실은 관점의 수만큼 존재하고, 인간은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기억을 재구성한다는 것 — 이 불편한 명제를 구로사와는 헤이안 시대라는 외피에 담아냈다. 서양 심사위원들이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 이 보편적 인식론의 위기 때문이었다.
“나는 완벽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계속 시도한다.”
— 구로사와 아키라
스필버그, 코폴라, 조지 루카스는 모두 구로사와를 스승이라 불렀다. 《7인의 사무라이》는 《황야의 7인》으로, 《요짐보》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황야의 무법자》로 다시 태어났다. 동양의 사무라이 이야기가 서부극이 되고 세계로 팔리는 이 역설적 순환 속에서, 구로사와의 원본은 오히려 더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 그는 인류 공통의 이야기를 담았기 때문이다. 사무라이의 갑옷은 형식이었고, 그 안에는 존엄과 배신과 희생이 있었다.
사티야지트 레이: 흙길 위의 서사시
1921–1992
1952년, 사티야지트 레이는 런던 출장 중 이탈리아 영화 《자전거 도둑》을 보았다. 그는 영화관을 나서며 결심했다. “인도의 이야기를 이렇게 찍을 수 있다.” 벵골로 돌아온 레이는 빗빈도라나트 반도팟야야의 소설을 각색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제작비가 없었다. 레이는 서양 희귀본 서적 컬렉션을 팔았다. 아내는 장신구를 팔았다. 주말마다 조금씩 찍으면서 3년이 걸렸다.
1955년 개봉한 《길의 노래(Pather Panchali)》는 칸 영화제에서 “최우수 인간 다큐멘터리”상을 받았다. 이후 《아파라지토》, 《아푸의 세계》로 이어지는 아푸 삼부작은 한 소년의 탄생부터 상실과 성숙까지를 따라가며, 극도로 단순한 삶 속에서 발견되는 보편적 인간성을 포착했다. 레이의 카메라는 서두르지 않는다. 대나무 숲 사이로 처음 기차를 보는 아푸와 누나의 장면 — 이 단순한 순간이 어쩌면 영화사에서 가장 순수한 경이의 기록이다. 레이는 이 장면을 위해 실제 기차 시간표를 알아내고 새벽부터 들판에서 기다렸다. 아이들의 반응은 즉흥이었다.
“인류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이 내게는 여전히 기적처럼 느껴진다. 그 기적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 사티야지트 레이
구로사와는 레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레이의 영화를 보지 않고 사는 것은 세상에 살면서 태양과 달을 보지 않고 사는 것과 같다.” 1992년 레이는 사망하기 불과 몇 주 전, 병상에서 아카데미 명예상을 받았다. 인도 최초였다. 시상 화상 연결 화면에서 그는 입원복 차림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의 마지막 영화 《아간투크》가 개봉한 지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은 때였다.
허우샤오시엔: 멈춘 카메라가 담는 것
1947–
허우샤오시엔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카메라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고정된 카메라 앞에서 인물들은 등장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사라진다. 관객은 그 장면을 “통해” 보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목격”하는 느낌을 갖는다. 허우는 이 거리를 오즈 야스지로에게서 배웠지만, 그것을 타이완의 역사와 기억에 접목시켰다.
《비정성시(悲情城市)》(1989)는 타이완 현대사의 가장 아픈 상처를 다룬다. 1945년 일본 패망 이후 1949년 국민당 정권이 밀려오기까지의 혼란, 그리고 1947년 2·28 사건 — 수만 명이 희생된 이 사건은 수십 년간 타이완에서 금기였다. 허우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이 역사를 담아냈다. 직접적인 폭력 장면 없이, 멀리서 바라보는 카메라로. 말해지지 않는 것들이 오히려 더 크게 들린다. 이 영화는 타이완 최초의 베네치아 황금사자상 수상작이 되었다.
“영화는 시간을 담는 그릇이다. 나는 그 그릇이 가능한 한 넓기를 원한다.”
— 허우샤오시엔
허우의 더 근본적인 혁신은 스타일에 있다. 그의 영화에서 클로즈업은 거의 없다. 얼굴의 표정보다 공간 속의 몸, 몸 주변의 공기가 더 중요하다. 시간은 흐르지만 사건은 느리게 일어난다. 그럼에도 관객은 영화가 끝나고 한참이 지나도 그 풍경과 침묵을 기억한다. 2015년 작 《자객 섭은낭》은 9세기 당나라를 배경으로 한 무협 영화이지만, 허우의 손에서 그것은 바람과 안개와 빛의 영화가 되었다. 칸 영화제 감독상을 받으며 세계는 다시 한번 이 고요한 거장에게 경의를 표했다.
세 시선, 하나의 질문
세 감독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모두 서양 영화의 문법을 흡수했지만, 그것을 그대로 재생산하지 않았다. 구로사와는 존 포드의 서부극을 일본의 사무라이로 번역했고, 레이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을 벵골의 흙길 위에 심었으며, 허우는 오즈의 고정 쇼트를 타이완 역사의 무게와 결합했다. 그러나 그들의 영화적 해법은 전혀 달랐다.
구로사와
극적 영화
폭풍과 긴장. 극단까지 몰린 인간에게서 드러나는 도덕적 진실을 드라마틱하게 포착한다.
레이
관찰의 영화
삶을 서두르지 않고 바라본다. 가난하고 단순한 일상 속에서 발견되는 시와 상실과 성장.
허우
기억의 영화
말해지지 않는 것을 담는다. 고정된 카메라와 긴 쇼트로 역사와 시간의 질감을 새긴다.
세 사람의 연결 고리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구로사와와 레이 사이다. 구로사와가 레이를 “태양과 달”에 비유했을 때, 레이는 인터뷰에서 구로사와야말로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동시대 감독이라고 답했다. 두 사람 모두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배웠지만, 자국의 고유한 것 — 일본의 무사도적 미학, 인도의 이야기 문화 — 을 통해 그것을 초월했다. 허우는 이 두 선배의 작업을 숙지했고, 오즈와 함께 그것을 다음 단계로 밀어붙였다. 아시아 영화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숙해왔다.
구로사와는 영화에 폭풍을 주었고, 레이는 영화에 흙냄새를 주었으며, 허우는 영화에 침묵이 말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셋이 합쳐지면 동양 영화가 세계에 기여한 이유가 된다.
그들이 열어놓은 문
세 감독의 영향은 아시아 영화를 넘어 세계 영화 전체에 스며들었다. 구로사와 없이 스타 워즈도, 《황야의 무법자》도, 봉준호의 초기작도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레이가 열어놓은 네오리얼리즘과 인도 이야기 전통의 결합은 이란 영화 운동부터 한국의 독립 영화까지 이어지는 계보를 낳았다. 허우의 미학은 왕가위, 에드워드 양, 차이밍량 등 동아시아 영화 작가들의 공통 언어가 되었다.
그들이 공통으로 실천한 것이 있다면, 영화를 산업이 아닌 예술로 대하는 태도였다. 구로사와는 제작사와 싸우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장면을 포기하지 않았다. 레이는 돈이 없어도 찍었다. 허우는 느리다는 비판을 들으면서도 긴 쇼트를 고집했다. 그 결과 그들의 영화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처음 봤을 때와 같은 힘을 유지한다. 좋은 예술이 그렇듯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어진다.
구로사와는 폭풍을 찍었고, 레이는 빗속 흙길을 찍었으며, 허우는 안개 속 인물의 뒷모습을 찍었다. 세 사람 모두 날씨와 계절과 빛에 민감했다. 어쩌면 그것이 동양 영화의 감수성이었는지도 모른다 — 인간을 자연 속에 두고, 그 속에서 인간을 보는 시선.
대표작
- 구로사와 아키라: 라쇼몬(羅生門, 1950), 7인의 사무라이(七人の侍, 1954), 이키루(生きる, 1952), 요짐보(用心棒, 1961), 란(乱, 1985)
- 사티야지트 레이: 길의 노래(Pather Panchali, 1955), 아파라지토(Aparajito, 1956), 아푸의 세계(The World of Apu, 1959), 아간투크(Agantuk, 1991)
- 허우샤오시엔: 비정성시(悲情城市, 1989), 동동의 여름방학(冬冬的假期, 1984), 카페 뤼미에르(珈琲時光, 2003), 자객 섭은낭(刺客聶隱娘,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