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봄, 펜실베이니아 시골의 한 폭포 위로 집 한 채가 떠올랐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의뢰인 에드거 카우프만에게 설계도를 보여주며 말했다. “당신은 폭포를 바라보며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폭포와 함께 살게 했습니다.” 같은 해, 파리의 르 코르뷔지에는 강철과 유리로 빚은 도시의 미래를 스케치하고 있었고, 베를린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온 미스 반 데어 로에는 “less is more”라는 여덟 글자로 건축의 문법을 다시 쓰고 있었다.
세 사람은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전혀 다른 방향을 바라보았다. 르 코르뷔지에는 인간을 위한 기계를 설계했고, 미스는 재료의 본질이 드러나는 침묵을 지었으며, 라이트는 건물이 대지에서 자라나듯 유기적으로 솟아나야 한다고 믿었다. 이 세 가지 방향은 각각 지금도 유효하다. 오늘의 도시는 이 세 사람의 대화 — 혹은 논쟁 — 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세 건축가의 궤적
르 코르뷔지에 (1887–1965) · 스위스 라쇼드퐁 출생 · 빌라 사보아, 샹디가르 설계
미스 반 데어 로에 (1886–1969) · 독일 아헨 출생 · 바르셀로나 파빌리온, 시그램 빌딩 설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1867–1959) · 미국 위스콘신 출생 · 낙수장, 구겐하임 미술관 설계
르 코르뷔지에: 살기 위한 기계
1887–1965
샤를에두아르 잔레그리는 1887년 스위스의 시계 제조 도시 라쇼드퐁에서 태어났다. 시계 장식 화가로 일하던 아버지와 피아노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그는 미술학교에서 그림을 배웠지만, 스물다섯에 파리로 건너가 오귀스트 페레와 함께 콘크리트의 가능성을 탐구하면서 건축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서른다섯이 되던 해, 스스로 “르 코르뷔지에”라는 이름을 지었다 — 어머니 쪽 조상의 이름을 따온 가명이자, 새로운 자아의 선언이었다.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철학은 다섯 개의 원칙으로 요약된다. 필로티(pilotis)로 건물을 땅에서 들어 올리기, 자유로운 평면, 자유로운 입면, 가로로 긴 띠창, 그리고 옥상 정원. 이 ‘근대 건축의 5원칙’은 1926년 발표된 개념이지만, 그 정신은 지금도 세계 곳곳의 아파트와 오피스 빌딩에 살아있다.
“집은 살기 위한 기계다. (Une maison est une machine-à-habiter.)”
— 르 코르뷔지에, 『건축을 향하여』 (1923)
이 한 문장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냉혹하고 비인간적인 건축을 옹호하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 코르뷔지에가 말한 ‘기계’는 효율과 합리성의 극대화를 뜻했다. 그는 당시 파리 빈민가의 비위생적인 주거 환경을 보면서, 건축이 사회를 바꾸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1925년 그는 파리 중심부를 전면 철거하고 십자형 마천루를 세우는 “브와쟁 플랜”을 제안했다. 도시 계획가들은 경악했지만, 그 도발이야말로 현대 도시 계획 토론의 출발점이 되었다.
1931년 완공된 빌라 사보아(Villa Savoye)는 그 원칙들이 완성된 형태로 구현된 건물이다. 파리 외곽 푸아시의 초원 위에 필로티로 떠 있는 순백의 육면체. 1층은 거의 비어 있고, 차가 건물 아래를 통과해 주차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나선형 경사로가 옥상 정원까지 이어진다. 방문자는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건물을 타고 올라가면서 경험하게 된다. 건축이 시간 속 산책이 된 것이다.
그러나 르 코르뷔지에는 모순의 인물이기도 했다. 도시를 위한 주택을 설계하면서 정작 자신은 인도 찬디가르의 건물들을 짓느라 수십 년을 보냈다. 빛과 그늘을 다루는 차양 장치 “브리즈 솔레이유”는 유럽의 미감이 아닌 인도의 강렬한 햇빛과 씨름하며 탄생했다. 그리고 1965년 여름, 그는 지중해 해변에서 수영하다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살기 위한 기계를 설계한 사람의 마지막은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는 것이었다.
미스 반 데어 로에: 덜어냄의 시학
1886–1969
루트비히 미스는 1886년 독일 아헨에서 석재 조각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위도, 정식 건축 교육도 없었다. 십대 때부터 아버지의 작업장에서 돌을 다루고 스투코 회사에서 도면을 그렸다. 그러다 베를린의 가구 디자이너 브루노 파울에게 스카우트되었고, 이후 페터 베렌스의 사무소에서 일했다. 그 사무소에서는 동시에 르 코르뷔지에와 발터 그로피우스도 일하고 있었다 — 20세기 건축의 씨앗이 한 방에 모여 있던 순간이었다.
미스는 1929년 바르셀로나 만국박람회의 독일관을 설계하면서 세상에 자신의 언어를 각인시켰다.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은 특별히 전시할 물건이 없는 전시관이었다. 건물 자체가 전시였다. 얇은 크롬 기둥 여덟 개가 지붕을 받치고, 트래버틴 대리석과 초록빛 알프스 대리석이 열린 공간을 가로지른다. 천장은 낮고, 유리 너머로 물이 고인 반영 못이 보인다. 찾아온 방문자들은 여기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몰라 당혹스러워했다. 그것이 바로 미스의 의도였다.
“적을수록 풍요롭다. (Less is more.)”
—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
나치가 집권하면서 미스가 이끌던 바우하우스는 1933년 강제 폐교되었다. 5년 후 그는 미국으로 건너갔고, 시카고의 일리노이 공과대학에서 건축학과장을 맡았다. 미국에서 미스의 스타일은 더욱 순수해졌다. 강철 프레임과 유리, 그것뿐이었다. 뉴욕의 시그램 빌딩(1958)은 그 정점이다. 파크 애비뉴에 서 있는 38층짜리 청동빛 유리탑. 건물 정면을 애비뉴에서 약 27미터 물러세워 지상에 광장을 만들었다. 당시 뉴욕의 건축 규제상 대지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미스는 그 관례를 거부하고 빈 공간을 도시에 선물했다.
시그램 빌딩이 완공된 후, 뉴욕시는 광장을 만드는 건물에 용적률을 추가로 허용하는 조례를 제정했다. 한 건물의 미학적 결단이 도시 법규를 바꾼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조례 이후 뉴욕 곳곳에 생겨난 “광장 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황량하고 차가운 공간이 되었다. 미스가 만든 것은 빈 공간이 아니라 “의미 있는 침묵”이었는데, 그것은 복제되지 않았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대지에서 자라난 건축
1867–1959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1867년 위스콘신에서 태어났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유럽의 두 건축가와 달리, 라이트는 미국 중서부의 대초원에서 출발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건축가가 되길 원하여 방에 프뢰벨 블록을 들여놓았다. 기하학적 나무 블록으로 형태를 익힌 유년 시절은 훗날 그의 건축 언어에 깊이 새겨졌다. 십구 살에 루이스 설리번의 사무소에 취직하며 “건축의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는 사상을 흡수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라이트가 평생 추구한 것은 “유기적 건축(Organic Architecture)”이었다. 건물은 대지와 분리된 물체가 아니라, 그 장소에서 자라나는 생명체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시카고 외곽의 평탄한 초원 지대에서 탄생한 프레리 양식(Prairie Style)은 수평선을 강조하는 낮고 넓은 지붕, 중심에 자리한 벽난로, 대지와 잇닿은 테라스로 이루어졌다. 건물이 땅에 묻히는 것처럼, 혹은 대지가 건물을 낳는 것처럼.
“건축은 모든 예술의 어머니다. 건물이 없으면 인류의 위대한 증거들은 땅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낙수장(Fallingwater, 1939)은 그 철학의 절정이다. 의뢰인 에드거 카우프만은 폭포가 보이는 곳에 집을 지어달라고 했다. 라이트는 폭포를 바라보는 집 대신, 폭포 위에 얹힌 집을 설계했다. 캔틸레버 구조의 콘크리트 테라스들이 폭포 위로 겹겹이 돌출되어 있다. 안에서 창문을 열면 물소리가 실내를 채운다. 낙수장은 미국건축가협회가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건물”이다. 그러나 라이트는 이 집을 짓기 직전까지 9개월간 설계도 한 장 그리지 않았다.
카우프만이 직접 탈리에신(라이트의 스튜디오)을 방문하겠다고 연락했을 때, 라이트는 조수들에게 “2시간 후 카우프만이 도착한다”고 알리고는 그 자리에서 설계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2시간 만에 평면, 입면, 단면이 완성되었다. 조수들은 선생이 설계를 머릿속에 이미 완성해두었다고 믿었다. 91세까지 살며 생애 마지막까지 붓을 놓지 않은 그는, 죽기 열흘 전까지도 건물을 설계하고 있었다.
세 가지 공간의 언어
세 사람은 한 번도 같은 자리에서 대화한 기록이 없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날카롭게 의식했다. 르 코르뷔지에와 라이트는 1935년 뉴욕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라이트는 그 자리에서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을 “상자들의 무더기”라고 비꼬았다. 르 코르뷔지에는 라이트를 “낭만주의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미스는 두 사람 모두를 조용히 무시했다 — 말 대신 건물로 응답하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르 코르뷔지에
기계와 합리
- 근대 건축 5원칙 — 필로티·자유 평면·가로 띠창
- 건축은 사회 문제 해결의 도구
- 콘크리트로 빚은 조각적 형태
- 도시 계획가의 시선
미스 반 데어 로에
절제와 침묵
- Less is more — 덜어낼수록 강해진다
- 강철·유리의 순수한 구조 노출
- 재료 자체가 말하게 한다
- 도시에 빈 공간을 선물한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자연과 유기
- 유기적 건축 — 대지에서 자라난 형태
- 수평선이 강조되는 낮은 지붕
- 중심의 벽난로, 자연과 연결된 테라스
- 건물은 환경의 일부여야 한다
건물들이 나누는 대화
1959년, 라이트가 세상을 떠난 그해, 뉴욕 5번가에 구겐하임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달팽이 껍데기처럼 나선형으로 감겨 올라가는 하얀 원형 건물. 라이트는 이 건물을 16년 동안 설계했고, 완공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예감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건물이 완공된 해에 숨을 거뒀다.
구겐하임 미술관 개관 직전, 뉴욕 미술계에서는 논란이 벌어졌다. 나선형 경사로에서 어떻게 그림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일부 화가들은 서명을 모아 항의했다. 라이트는 태연했다. 그는 사람들이 건물 안을 걸어다니면서 그림을 보는 방식 자체를 바꾸길 원했다. 미술관이 그림의 배경이 아니라, 그림과 함께 경험되는 또 하나의 예술이 되길 바랐다.
“모든 위대한 건축은 신의 말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세 사람은 각각 자신만의 방식으로 같은 질문과 씨름했다. 인간은 공간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르 코르뷔지에는 빛과 합리성으로 답했다. 미스는 재료의 진실로 답했다. 라이트는 자연과의 연속으로 답했다. 그 세 개의 대답이 지금도 우리가 사는 도시를 구성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세 사람 모두 자신의 집을 직접 설계했다는 점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파리 외곽에 작은 오두막 “카바농”을 지었다 — 가로세로 각 3.66미터, 단 한 사람이 살기 위한 최소의 공간. 미스는 일리노이의 들판에 판스워스 하우스를 설계했다 — 오직 강철과 유리, 그리고 숲. 그리고 라이트는 위스콘신 숲속에 탈리에신을 짓고 평생 살았다. 의뢰인의 요구보다 자신의 신념이 가장 순수하게 반영된 건물들이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집이었다.
건축은 시간을 이긴다.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빌라 사보아에는 지금도 하루에 수백 명이 찾아온다. 미스의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은 1986년 원형 그대로 재건되었다. 라이트의 낙수장은 매년 15만 명이 방문하는 순례지가 되었다. 세 사람이 그린 공간은, 그들이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사람들을 초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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